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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지 Apr 28. 2023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그 맛  


2017년 7월, 첫째를 낳기 일주일 전이었다.

당시에 집수리가 마무리되지 않아 부엌이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며칠을 더 기다리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문제는 인부들이 전부 휴가를 가서 3개월 뒤에나 가능하다고 말했다.


스웨덴에 와서 처음으로 걷잡을 수 없는 우울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한 빠르게' 흘러가는 한국과 다르게 '가능한 한 천천히' 유독 여유 있는 이곳만의 시간이 좋았는데 지금은 반대로 싫던 게 그리워졌다. 아무튼 내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상황에선 남는 건 스트레스뿐이다. 


남편은 장모님 오실 때까지 참아보자 했지만 난생처음 딸의 집에 그것도 스웨덴까지 오시는데 출산만 아니면 엄마가 비행기 타는 것도 말리고 싶을 정도로 그 누구에게도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내 신세한탄을 노래로 만들었다면 한 20절까지는 갔을 테다.


임시방편으로 휴대용 전기레인지를 샀지만 캠핑 온 것도 아니고 거실에서 쪼그려 앉아 음식을 데우고 설거지는 화장실에서 해야 하는 생활은 일찌감치 요리를 접게 했다. 전혀 요리를 못하는 남편은 햄버거, 미트볼, 피자등 포장 가능한 음식을 부지런히 사다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맛있게 먹은 음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내가 좋아하던 한식만 떠올랐다. 


조금의 위안이라도 얻을까 싶어 신라면을 끓여 먹고 있던 와중에 문자 한 통이 왔다.



"수지 샘 내가 음식을 좀 했는데 갖다 줄까 해서.."



5년 전 나를 살리고 위로해 주었던 한식 


당시 스웨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내가 한글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의 학부모가 전부였다.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도움받을 곳도 없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배고픔과 함께 외로움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스치듯 말했던 집수리, 출산 이야기를 듣고서 한글학교 어머님 한 분이 우리 집까지 손수 음식을 가지고 오신다고 했다.


사양할 처지가 아니라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며 역 앞까지 마중을 나갔다. 무거운 반찬 통을 들고서 트램에서 내리셨던 수경 어머님. 바빠서 많이 못 만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반찬 가짓수만 보더라도 얼마나 마음을 써주셨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바쁘게 젓가락 움직여가며 오랜만에 양볼이 터지도록 음식을 쑤셔 넣었다. 


"아.. 살았다."


눈앞에서 놓칠 뻔한 비행기를 탄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뛰고서 마시는 물 한잔처럼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안도감이 목구멍에 차올랐다. 

 

정성이 가득 담긴 한식들 


첫째를 낳은 지도 어느덧 5년이 훌쩍 지난 2022년 11월, 나는 막달까지 입덧과 씨름하며 둘째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스웨덴살이 7년 차에 접어들면서 전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다. 특히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할수록 내가 여기서 왜 이 생고생(?)을 해야 하나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엄마가 편찮으셔서 스웨덴에 오실 수가 없게 된 터라 이제는 뭐든지 스스로 해야 했다. 산후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 검색하며 정보를 모아봤지만 그렇다고 막막함이 사라지진 않았다. 지인들에게 음식만 좀 도와달라 부탁해 볼까 카톡을 쓰다 만 이유도 입덧하면서 거의 연락이 단절된 상태라 무턱대고 음식이야기를 꺼낼 용기도, 어쩌면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출산일이 가까워지면서 한국 지인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치 내가 문자 보내려다 만 걸 안다는 듯이, 내가 그들에게 물으려던 말에 답변을 메시지로 보내왔다. 


"제가 된장찌개랑 밑반찬을 좀 했는데 먹을 수 있겠어요?"

"미역국 좀 끓여갈까 하는데.."

"입덧은 좀 어때요? 미역국은 많이 먹을 테니 곰국 좀 끓여줄까요?."

"잠깐 집 앞에 나올 수 있어요? 나 밑반찬 좀 해갖고 왔는데" 


텅텅 비어있던 우리 집 냉장고는 잠시 친정엄마가 다녀가신 것처럼 한식으로 가득 채워졌다. 산후조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이 가득했던 마음속엔 어느새 감사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심청이는 심봉사가 젖동냥을 해서 살렸다는데 나는 이 한식들로 힘을 얻고 있는 게 아닌지.  


만든 사람들은 다르지만 한 가지 같은 재료가 한 스푼씩 꼭 들어가 있는 거처럼 내 몸에서는 같은 반응을 보였다. 먹을수록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맛. 저마다 넣어주신 한국인만이 아는 가슴 따뜻한 정이 아닐까 


나에게 찾아온 이 따뜻한 마음들 잊지 않고, 또 누군가에게 나눌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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