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같은 '지젤'은 없다. 그럼에도 '지젤'만 보고 살기엔 인생이 짧다. 고전 명작도 좋지만 새로운 작품에도 목마른 까닭이다. 사람 생각은 동서고금 비슷한 법. 올초 영국과 미국에서 화제가 된 발레 신작이 있었으니,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다. 원제는 'Like Water for Chocolate'. 영국에서 태어난 안무가 크리스토퍼 휠든(Christopher Wheeldon)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안무했다. 미국의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와 영국의 로열발레단이 앞다퉈 올 상반기 대표작으로 무대에 올렸다.
발레 기사는 자제하라는 압력이 가시화 중이라 기사화는 언감생심이지만, 그래도 휠든이라는 안무가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73년 생인 그는 이번 작품 외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흥미로운 작품을 다작해 왔다. 이 추세라면 100년 후엔 "21세기의 마리우스 프티파('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 안무)" 반열로 추앙받지 않을까. 그의 작품을 아직 직관 못한 게 한이다. ABT의 서희(Hee Seo) 수석무용수도 무대에 오른다기에 휴가를 얻을까도 했지만, 조직 생활 생리 상 무리.
'Like Water for Chocolate'의 pas de deux. Copyright: ABT Instagram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소설이라도 먼저 읽어보자는 마음에 주문한 원작. 이제야 이 책을 읽었다니, 그간 소설 좀 읽었다고 폼 잡은 게 부끄럽다. 라우라 에스키벨(Laura Esquivel), 1950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여성 작가다. 1989년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요리 문학'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고.
각 챕터를 대표하는 요리 레시피를 먼저 내세우고, 그 요리를 하게 되는 배경과 이유, 결과로 스토리를 풀어낸다. 책을 읽다 보면 배도 고파지지만 스토리 특유의 강렬함에 맘과 몸이 뜨거워진다. 원제인 'Like Water for Chocolate'의 뜻 역시 '핫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끓어오른 물처럼 부글거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멕시코 속담이라고.
발레 덕, 인생 책♡
'지젤'이나 '라 바야데르' 등 고전 발레 작품의 단골 소재는 배신과 용서다. 배신의 주체는 남자. 여자는 그 배신으로 죽음에 이르지만, 결국 남자를 용서한다는 줄거리. 21세기 하고도 23년째인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으로선 못마땅한 스토리이지만, 안무와 음악은 천상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니, 그래도 계속 본다.
'Like Water for Chocolate'은 비슷한 듯 다르다. 스토리를 구성하는 굵직한 씨줄은 역시 배신이지만, 주인공 티타는 용서라는 날줄을 쉽게 엮지 않는다. 운명에 순응하긴 하지만 그건 소극적 순응이다.
주인공은 티타. 어머니인 여장부 엘레나의 품 대신 집안 요리사 나챠의 부엌에서 유년을 보낸다. "막내딸은 엄마가 죽기 전까진 결혼하지 않고 곁에서 수발을 들어야 한다"는 건 엘레나가 철석같이 믿는 집안의 전통. 티타는 페드로와 사랑에 빠지지만, 전통의 탈을 쓴 엘레나의 고집으로 사랑을 단념. 페드로는 대신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을 택한다. 한국식 막장 드라마 같은 이 선택의 변인즉슨, 티타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 티타는 요리를 통해 자신의 분노와 갈망을 표출한다.
이 작품은 '페미니스트 문학'으로도 분류된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스토리.
크리스토퍼 휠든은 미국 댄스 매거진(Dance Magazine)과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약 30년 전에 읽고 발레 작품으로 꾸며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다고 한다(https://www.dancemagazine.com/christopher-wheeldon-like-water-for-chocolate/). 그는 "티타와 페드로 사이의 강렬한 긴장감이 내 안에 계속 남아 나를 끌어당겼다"라고 말했다.
휠든이 훌륭한 안무가인 것은 그가 이 안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들인 공에서도 드러난다. 안무를 본격 시작하기 전, 멕시코시티에 거주하는 원작자 라우라 에스키벨을 직접 찾아가는 정성까지 보였다고 한다. 에스키벨은 책에도 등장하는 참판동고(champandongo)라는 멕시코 식 라자냐를 직접 요리해 줬다고. 휠든은 독재자 엄마인 엘레나를 거인으로 표현하는 무대장치와, 티타와 페드로 간의 격정의 2인무인 pas de deux를 만들어냈다. 뉴욕타임스(NYT)의 콧대 높은 리뷰어는 "원작의 플롯에 발레가 안보인다(Plot overtakes ballet)"라고 그닥 좋지 않은 평가를 줬지만, NYT의 리뷰란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 그만큼 스토리가 강렬한 것은 틀림없다.
여기서 생각해 본다. 21세기 대한민국만의 발레란 뭘까. 다양한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응원을 보내왔다. 개인적으론 최근 이현준 수석무용수 인스타그램 덕에 보게 됐던 작품, '라이프 오브 발레리노' 중 창작 솔로, 'L'oltraggio mio non vendica'(나의 분노는 복수하지 않아)는 압권이었다.
독자의 양해를 구하며 살짝 삼천포.
이 작품의 원곡은 찾아보니 '사계'로 익숙한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가 썼던 오페라의 일부라고. 'Argippo'라는 제목의 이 오페라는 비교적 최근 발굴됐다고 한다.
이 곡의 전체 가사를 압축하면 "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한 남편이여, 너같이 사악한 남자는 곧 번개에 맞아 나의 정당한 분노의 희생양이 되리라. 하지만 난 여전히 너의 부인이니, 돌아오라 그러면 용서해 줄 터이니. 나의 눈이여 배신당한 사랑의 고통을 눈물로 쏟아내기를." 용서는 무슨
출처: https://youtu.be/Nj0bhLDSzeU
다시, 지금 여기의 한국 발레 본론으로 돌아와서.
결국, 스토리다. 한국은 스토리의 풍성함으로 따지자면 꽤나 유리하다. 드라마틱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한국의 역사이니까. 그 역사가 정치적인 이해와 맥락으로 단순히 곡해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 다행히 한국엔 에스키벨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서사를 잘 엮어내는 여성 소설가들이 축복처럼 존재한다. '밝은 밤'의 최은영, '아직 멀었다는 말'의 권여선,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정세랑 등등. 한국이 가진 특정한 서사를, 세계 어디에서도 통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데 어떻게든 일조하고 싶다.
문제는, '어떻게.' 그 답을 찾는 과정은, 이 질문을 던지는 지금 이미 시작됐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다.
아래는 'Like Water for Chocolate'의 일부 발췌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권미선 번역 124~125쪽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중략) 자신의 불씨를 지펴 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그래서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렬한 불길이 꺼질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티타는 불행히도 자신의 성냥이 이미 축축해져서 곰팡이가 가득 슬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는 그 누구도 불을 지필 수 없었다."
그런 티타에게, 그리고 나에게, 아마도 당신에게, 다정한 구원이 되어줬고 되어주길 바라는 다음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