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을 두른 듯"한 것은 "남산 위에 저 소나무"만이 아니다. 애국가 2절에서도, 발(레미)치광이는 코어 근육을 떠올린다. 발레 명언의 달인, 최시몬 선생님이 클래스에서 하신 말. "갑옷을 입은 것처럼 코어를 잡아 몸통 박스를 지키고, 아이언맨이 슈트를 입을 때처럼 풀업하세요"라는 말을 들은 뒤, 애국가를 생각하면 항상 발레 코어 근육이 떠오른다.
애국가뿐이랴. 소설도 그렇다. 현진건 작가의 '운수 좋은 날'의 그 유명한 문장, "설렁탕을 사 왔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는 이렇게 치환된다. "코어가 있는 데 왜 쓰지를 못하니."
있는 데 못 쓰는 이유. 있어야 할 만큼 있지 않아서, 있지만 어떻게 쓸 줄을 몰라서. 나는 둘 다다. 바디 빌드업 수업은 그런 내게 '몸의 계몽'의 순간을 안겨주고 있다. 부끄럽지만, 몰랐다. 발바닥에도 근육이 있다는 걸. 내재근이라고 한단다. 선생님들이 발바닥을 마치 혓바닥처럼 움직이시는 비결은 내재근을 비롯한 발바닥의 근육과 발가락의 골격 및 근육을 완벽하게 가동시키기 때문인 것이었던 것이었다.
취미발레인들 사이 핫한 화제의 실용서 『발레 근육 핸드북』(동글디자인)에 발바닥 내재근 단련을 위한 '발 합장 단련법'(116쪽)까지 소개돼 있을 정도다. 발레 무용수들이 테라밴드 또는 수건을 발가락으로 집는 운동을 루틴으로 하는 것도, 같은 맥락. 수건을 발가락으로 잡는 거, 쉽지 않냐고? 그렇게 묻는 당신은 프로 무용수이거나, 한 번도 이 운동을 해보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
예쁜 줄만 알았던 발레. 결국 강해야 예쁠 힘도 있는 것. By Sujiney
발레 무용수들은 '몸의 조각가'들이다. 매일의 클래스로 자신의 골격과 근육을 조각해 낸다. '발레리나'라고 하면, 으레 이런 이미지가 연상될 것. 불면 날아갈 듯 여리여리하고, 이슬만 먹고 살 듯한 파리한 얼굴, 등등.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여리여리한 것은 맞지만 발레 무용수들은 남녀 모두 코어근육 전사들이다.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 인체의 모든 근육을 단련하고 자신을 조련해 내는 존재들 이어서다. 본진 발레학원에 해부학 책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고, 코어 강화와 근육 단련에 집중하는 '바디 빌드업' 시간이 개설되어 있는 까닭. 매일의 클래스에도 선생님마다 루틴 구성의 차이가 있을 뿐, 코어 강화 및 스트레칭은 반드시 들어간다. 우리 학원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원이. 우리 학원은 없다고? 알아서 하고 오라는 뜻이다.
커버에도 쓴 이미지. 로베르토 볼레(왼쪽)와 멜리사 해밀튼 무용수다. 해밀튼의 저 초콜릿 복근에 경의를. 출처 & copyrigh Melissa Hamilton Instagram
그만큼 근육과 골격을 알고 활용하는 건 발레에서 필수 요소다. 부드럽게 날아가기 위해선 강인한 코어와 골격이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그립고 그리운 여름 선생님과 연주 선생님이 코어 단련과 스트레칭을 목놓아 강조했던 것, 새삼스럽다. 훈일 선생님이 바워크 끝나자마자 쉴 틈 없이 "바닥에 누우세요!" 외치는 것도, 누워서 쉬란 얘기가 아니다. 그럴 턱이 없지. 등을 대고 누워 양다리를 들고 허벅지를 교차하는 '공중 앙트르샤 캬트르'의 양옆 및 앞뒤 반복이다. 곡소리가 난다.
신체 가동 능력을 한참 길러야 하는 나 같은 이에게, 사실 코어 근육 강화는 기초 중의 기초다. 성은 선생님 말씀처럼, 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한 뒤 그 위에 달릴 차를 마련해야 하듯, 코어 근육은 발레의 인프라 건설인 셈.
멜리사 해밀튼 무용수의 또다른 사진. 저 선명한 등근육. 완벽하다. 내 핸드폰 배경사진이라는, TMI. 출처 & copyrigh Melissa Hamilton Instagram
고백하지만, 그래서 꽤 오래 루틴을 만들어 해왔다. 문제는, 루틴을 계속해도 한동안 발전이 없었다는 점. 오히려 어깨와 목에 더 힘을 주고 상부 승모근만 올라왔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그간 코어 루틴이랍시고 해왔던 것들은 껍데기였음을. 코어에 힘을 안 주고 반동 또는 어깨 힘으로 플랭크를 하거나 윗몸일으키기 등을 해왔으니. 힘을 주지 말아야 할 곳, 외려 힘을 빼야 할 곳에 힘을 주는 잘못된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자족 때로는 자만을 하고 있었던 셈. 또 한 번 깨닫는다. 발레뿐 아니라 인생의 많은 것이 그러하듯,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
내가 하는 루틴이 잘못된 점은 최시몬 선생님 클래스에서 먼저 깨달았다. 선생님께서 "코어 강화와 스트레칭도, 실용주의로 접근해야 해요"라면서 "실전에 적용하는 근육을 강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하고 있어요"라고 주의를 주신 것. 마침 그즈음 시작한 바디 빌드업에서도 조성은 선생님은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아요"라고 필요한 일침을 놓았다. 제대로, 공을 들여, 내 몸을 마주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의 내린 뒤, 선생님의 방향을 따라 천천히 꾸준히 하면, 된다.
사실 내가 앞서서 나름의 코어 루틴을 해야겠다고 맘먹었던 건 한국의 자랑스러운 무용수, 김기민과의 인터뷰 덕이었다. 세계 최고 발레단 중 하나인 러시아 마린스키의 수석무용수인 그는, 휴일 오전 10시 인터뷰도 무용실에서 하자고 청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그는 땀 뻘뻘. 그는 말했다.
"제가 올해 서른인데, 전성기를 마흔으로 잡고 싶어요. 그러려면 제가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해야 하고, 몸을 단련해야죠. 그래서 매일 아침 루틴을 구성해서, 전날에 아무리 늦게 잤건, 장거리 비행을 했건, 무조건 합니다. 저와의 약속이니까요."
멋지지 않은가. 김기민의 많은 특기 중 하늘로 날아올라 머무르는 체공, 즉 발롱(ballon)은 이런 강철 코어에서 나온 거였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쉽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자기 키만큼 점프해서 공중에 머무르는 건,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도 않다. 김기민은 그걸 보여준다. 마흔이 아니라 쉰에도 김기민의 전성기는 계속될 듯.
2022년에 가장 잘 한 두 가지. 김기완 김기민 형제 무용수 인터뷰. Copyright Sujiney
그날 이후 생각했다. 김기민 무용수가 이렇게 하는데, 내가 뭐라고 안 하나. 그렇게 나름 시작한 게 루틴이다. 앞서 얘기한 시행착오도 겪긴 했지만, 그래도 모든 건 소중한 과정이다.
김기민 무용수뿐 아니라 사실 대개 모든 무용수가 본인만의 단련 루틴이 있다. 하다못해, 발레의 역사를 바꾼 19세기 무용수, 마리 탈리오니(1804~1884)도 그러했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마리 탈리오니는 실력도 출중하지 못했고 체격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진화하는 발레 클래스』(플로어웍스)의 제3장 테크닉 중 '기초 연습과 반복 연습' 108쪽을 그대로 옮긴다.
"엄격한 발레 마스터였던 필리포 탈리오니는 매일 6시간씩 마리를 훈련시켰습니다. (중략) 연습시간만 길었던 게 아닙니다. 100까지 세는 동안 한 가지 자세를 유지해야 했고, 굽은 등을 감추기 위해 관절의 가동 범위를 늘리고 근력을 높이는 데 집중했습니다. (중략) 스포츠 영화의 극단적인 훈련 장면을 떠올려야 합니다. (중략) 마리는 기초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강철 같은 체력과 근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그 결과 힘을 하나도 들이지 않고 우아하게 발끝으로 뛰어올랐다고 합니다. 아마 마리는 힘들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힘들지 않았을 거예요."
와우. 역시. 공짜는 없다.
마리 탈리오니. 낭만발레의 시대를 열었다.
결국 철갑을 두른 듯한 코어를 갖는 건 어렵고, 게으름의 유혹을 이기는 건 괴롭다. 그럼에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과거와 현재 무용수들은 모두 실증해 준다. 그래도 솔직히 가끔은 지친다. 지난주에도, 사실 조성은 선생님께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던 나. "이렇게까지 하는 데 이렇게나 늘지 않는 거, 정상일까요?" 나의 미 우문에, 선생님은 쿨하게 이런 명답을 내놓았다. "언젠가, 한꺼번에 (성장이) 올 거예요, 옵니다!" 넵 믿슙니다 선생님.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Y-T-I 레이즈 루틴과 내재근 강화, 내전근 단련 등을 위한 루틴을 계속한다. 힘들면서도 내가 내 몸을 알아가는 이 과정은 흥미롭다. 결국 내 몸과 맘은 내가 챙길 수 밖에 없다. 코어에도, 맘과 몸에도 철갑을 두르자. 아름다울 힘을 기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