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시장님, RIP

그래 나 토종이다 the 13th

by Sujiney

“어이쿠, 영어신문이면 인터뷰도 영어로 해야 하는 건가요?”


1990년대 끝자락, 대학 영어신문 기자였던 나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박원순 씨를 꼭 만나고 싶었다.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위와 같은 농담으로 답을 했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그의 사무실은 좋게 표현하자면 활기찼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신이 없었다. 서류 뭉치가 아슬아슬 쌓여있고 전화는 쉴새 없이 울려댔다. 일에 파묻혀 사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변호사인데 돈 많이 벌고 싶지 않으세요?”라는,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유치한 질문도 했다. 그는 껄껄 웃으며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요지의 답을 했던 것 같다.


이후 그를 만날 기회가 몇 차례 더 있었다. 2009년 12월, 당시 그를 두고 정계 진출 설이 한창 솔솔 피어 오르던 때, 차를 한 잔 했다. 인터뷰도 아니고 사적인 자리였지만 직업병 때문에 물었다. “그래서, 정치 쪽으로 가시나요?”

당시 나는 “에이, 내가 무슨 정치에요”라는 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옆에서 하도 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는 몇 개월 후, 서울특별시장이 됐다.


니콜라스 베르그루엔과 함께 한 박원순 시장. 2015년 사진이다.


2015년엔 외신기자 친구 한 명이 불러서 그의 시장실로 찾아갔다. ‘집 없는 억만장자’로 유명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박 시장을 만난다며 괜찮으면 함께 보자고 했다. 베르그루엔은 나도 몇 번 인터뷰를 했던 터. 안 갈 이유도 없었다.


당시 찾아갔던 시장실도 아니나다를까, 서류 더미와 책 더미에 정신이 없었다. 베르그루엔에게 명예 서울시민증을 준 박 시장은 통역이 있긴 했지만 영어로 대화를 하려고 했다. 내게 “영어로 인터뷰해야 하는 거냐”고 농담을 했던 박 시장이 아니었다. 외신기자 친구는 내게 “요즘 박 시장이 영어 공부 열심히 한다. 꿈을 크게 꾸는 거 같다”고 귀띔했다. 그 친구 말이 맞았다. 청와대 입성 꿈도 꿨으니까.


그래서 나는 믿지 않았다. 2020년 7월9일 오후6시쯤, 편집국에서 한창 기사를 마감하던 중 들려온 뉴스 말이다. 사회부 데스크가 갑자기 (원래도 분주한데) 더 분주해지더니 “뭐? 박 시장이?”라고 했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정보를 경찰 출입 기자들이 보고한 모양이었다. 곧 뉴스 방송 모니터에도 관련 자막이 뜨기 시작했다. “유서 같은 말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됐다”며 딸이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다고. 박 시장을 아는 기자들은 다들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지만 자정을 넘기고 그의 시신이 발견됐으며 경찰에서도 사실 확인을 해줬다. 이제 고(故)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다. 명복을 빈다.


박원순 시장의 유서. 가족이 숙의 끝 공개했다. [중앙일보]


그의 급작스러운 극단적 선택은 외신에서도 주목 받았다. 얼마 전 브런치 글에 인터뷰했던 뉴욕타임스의 최상훈 서울지국장도 기사를 썼다. 주요 부분을 소개하면 이렇다.



우선 헤드라인과 부제.

Seoul Mayor Is Found Dead After Harassment Complaint Is Filed

Mayor Park Won-soon, who vanished after leaving a cryptic message for his daughter, had faced a newly filed complaint from his secretary.

서울시장, 추행 고소장이 접수된 ,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다

딸에게 수수께끼 같은 메시지를 남긴 뒤 사라진 박원순 시장은 비서에게 고소를 당한 상태였다.

주목되는 단어는 cryptic 이다. 수수께끼 같은, 아리송한 등의 의미다.

뉴욕타임스 기사 캡처. [NYT 홈페이지]


기사 중에서 박 시장을 소개한 부분이다.

Word of the mayor’s death and its possible links to sexual misconduct sent shock waves across the country, not only because Mr. Park was a political star but also because he had long been seen as a champion of women’s rights. His positions stood out in a country where men dominate society’s upper echelons, enforcing a strictly hierarchical code that analysts say makes women vulnerable to abuse and forces its victims to stay silent.

박 시장의 사망, 그리고 그것이 성추행 관련 가능성은 한국에 충격파를 던졌는데, 박 시장이 정치적 스타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오랜 기간 여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사회 고위직을 지배하고,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요해 전문가들이 볼 때 여성이 여러 학대적 상황에 놓이기 쉬우며 피해를 입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은 이 나라에서, 박 시장의 위치는 독특했다.

계급이라는 말을 쓸 때 나온 echelon 이라는 단어에 밑줄 쫙. 고급진 단어다. 보통 사회 계급이라고 하면 social hierarchy라는 표현을 쓰지만, 바로 뒤에 hierarchical 이라는 파생 단어가 나오니 피하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선별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는 뜻으로 a champion of women’s rights라는 표현을 쓴 것도 눈여겨보자.

기사 전체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 한국의 언론사와 달리 대다수의 해외 언론매체들은 기사에 과금을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클릭하시길. 초기 몇 회는 무료 제공된다.

https://www.nytimes.com/2020/07/09/world/asia/seoul-mayor-dead.html?searchResultPosition=3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은 영어로 어떻게 할까.

I hope s/he would rest in peace.

줄여서 Rest in peace, 더 줄여서 RIP 라고도 많이 한다.

RIP, 박원순 시장님.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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