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 괴로워지는 책이 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어서 괴로운 책이라면 해결은 쉽다. 바로 책을 덮고 중고서점에 갖다 팔면 된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데 그게 읽을수록 나라 걱정에 괴로운 책이라면 문제는 복잡.
맞다.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쓴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 얘기다.
볼턴은 아주 작정을 하고 책을 썼다. 자기를 트윗으로 해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한국에서 ‘참 군인’으로 존경받았던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에다, 한때 그래도 잘 지냈던 현 국무장관(이자 미래의 백악관 주인장을 꿈꾸는) 마이크 폼페이오도 잘근잘근 씹고 뜯는다.
직접 촬영한 사진. 2018년 평양 남북 정상회담 후 서울 동대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래도 Chapter 2~3은 제3자의 입장에서 팔짱 끼고 흥미롭게 읽었다. 예를 들면 니키 헤일리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이렇게 바보로 만든 부분이다. 볼턴의 시점으로 paraphrase, 조금 바꿔서 써봤다.
-니키 헤일리, 자기 혼자 왜 저리 나대? 시리아 알 아사드 대통령을 응징하기 위한 작전을 프랑스ㆍ영국과 함께 결정했는데, 혼자서 다 발표하겠다고? 어쭈. 내가 유엔 주재 대사(2005~2006년) 해봐서 안다. 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내가 프랑스ㆍ영국 대사와 함께 발표하라고 조언했더니 싫다면서 혼자 나서더라. 느낌이 안 좋아.
-군사 공격을 해야 한다고 해서 장관들이 다 모였는데, 헤일리가 반대했다. 반대 이유가 뭔지 아나. 자기 남편이 National Guard 소속이라서 다치면 안 된다는 거다. 오 마이 갓. 뭐 이런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대사가 다 있나. 요지경이다.
왼쪽 언니가 니키 헤일리. 사임 발표 날이다. 혹자는 헤일리 보면 톰 크루즈가 생각난다나 뭐라나... [사진 TIME]
트럼프는 헤일리에 대해 볼턴과 생각이 달랐다. 헤일리 대사는 2018년 12월 사임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불러 동석한 채 기자회견을 여는 이례적 장면까지 연출해줬다. “헤일리는 많은 일을 해결해줬고, 그가 곧 다른 자리를 맡아주길 바란다”는 공치사까지 했다. 일각에선 헤일리가 후일 백악관 입성을 노린다는 얘기도 돈다.
볼턴은 매티스 전 국방장관에 대해선 작정하고 이렇게 써놨다. 이 부분은 그대로 옮긴다.
“I soon realized Mattis was our biggest problem. (중략) It was simple truth that not presenting options until the last minute, (중략) and then table-pounding, delaying, and obfuscating as long as possible were the tactics by which a savvy bureaucrat like Mattis could get his way.”
그대로 옮기면
“나는 곧 매티스가 우리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걸 알아챘다. (중략) 최후의 순간까지 (대통령에게) 선택지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중략) 테이블을 주먹으로 탕탕 내려치고, 끝까지 미루고, 최대한 오랜 기간 동안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매티스와 같은 노회한 관료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방법이라는 건 그냥, 진실이다.”
밑줄 쫙 단어: obfuscate 혼란스럽게 하다 / savvy 사정을 잘 아는, 요령 있는 (여기에선 볼턴 원문의 맛을 살려 ‘노회한’이라고 번역했다)
제임스 매티스 전 미국 국방장관
매티스가 누군가. 별명은 ‘수도승’(일이 너무 바빠서 결혼할 시간도 없었다는 진짜? 사람)이고, 트럼프와 같은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한 ‘어른들의 리그’ 중의 멤버였으며, 부하의 군복까지 대신 다려줬다던 츤데레 미담까지 차고 넘친다. 그러나 볼턴은 이를 다 깨부순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그의 주장일 뿐이다.
이쯤에서, 누구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매티스의 애독서라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중 일부가 떠오른다.
“내가 오늘 대할 사람들은 참견만 하며, 감사할 줄 모르고, 오만하면서, 정직하지 않고, 질투심이 많으면서, 무례하다. 사람들이 그렇게 된 건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몰라서다."
매티스와 볼턴은 서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진짜 괴로운 부분은 Chapter 4부터 시작이다. 제목은 ‘The Singapore Sling.’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됐던 1차 북ㆍ미 정상회담의 성사 전후의 막전막후를 소상히 다뤘다. 최근 사임한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히 나오는 부분도 이거다.
일단 제목부터 Singapore Sling. 물론 유명한 칵테일 이름을 그대로 갖고 온 거지만, 행간엔 이 회담을 비웃는 뉘앙스가 철철 넘친다.
sling이라는 단어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1)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휙 내던지다 2) 뭔가가 느슨하게 매달려있다 3) 사람을 억지로 밀어 넣다 정도다. 북ㆍ미 정상회담에 대한 그의 인상비평이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에 대해선 아예 비판적 태도를 대놓고 드러낸다. 한국의 문재인 정부가 정의용 실장을 필두로 미국을 북ㆍ미 정상회담의 틀로 유인했으며, 이는 너무도 큰 잘못이라는 게 요지다. 여기에다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그의 보좌관들은 그나마 외교 전략을 잘 세우고 기민하게 대처했다고도 썼다. 한국을 비판하기 위해 볼턴이 썼던 표현들은 이렇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schizophrenic(정신분열적)’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들고일어났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
"The diplomatic fandango was South Korea’s creation, relating more to its “unification” agenda than serious strategy on Kim’s part or ours. The South’s understanding of our terms to denuclearize North Korea bore no relationship to fundamental US national interests, from my perspective. It was risky theatrics."
다음은 번역.
"이 외교 춤판은 한국의 창조물이었는데, 김(정은)이나 우리(미국)의 진지한 전략이 아닌 단순한 그들(한국)의 '통일' 어젠다에 더 관련이 컸다. 내가 볼 때 한국은 우리(미국)의 북한 비핵화 조건의 이해는 미국의 기본적 국인에 대한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못했다. 이건 위험천만한 연극이었다."
2018년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연일 '뻗치기 취재'를 했던 북한 현지 대사관 앞. OOO 공사님 건강하시려나. 그때 선물 고마웠어요. [사진 SJ]
여기에다, 정의용 당시 실장이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꺼냈다는 말도 적시돼있다. 이 말인즉슨, 북한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며, 절대 해줄 생각이 없는 말 중 하나인 CVID를 한국이 미국에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거짓말로 흘렸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 해서 3자 회담으로 하고 싶어 했지만 북한과 미국 모두 관심 없었다는 얘기도 써놨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좋은 표현들은 메모.
Bobbsey Twins: 볼턴은 사이좋은 두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썼다. 관용구다. 우리의 ‘철수와 영희’ 격 정도 될까. 밥시 성의 두 쌍둥이 남매가 겪는 여러 모험을 다룬 유명한 동화다. 단, 밀레니얼들은 잘 모를 수 있으니 꼰대주의보 주의.
얘네들이란다. [사진 위키피디아]
Sibylline Books: 고대 그리스 시절 신탁을 모아놓은 책이다. 볼턴은 북한은 비핵화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은 확고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이 표현을 썼다. 재미있는 표현이라 한 발 더 들어가 봤다.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니 Sibylline이라는 표현은 고대 여성 사제였던 Erythraean Sibyl에서 파생된 말이다. 신탁을 받고 그 신탁을 기록해 놓은 책이 곧 Sibylline Books 인 셈.
이 언니가 그 Erythraean Sibyl. [위키피디아]
난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 현장에 있었다. 취재를 하며 외교안보 분야 기자로서 그만큼 가슴이 뛰었던 적은 손에 꼽는다.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을 직접 보고,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참석해 질문을 하려고 미친 듯 소리도 질러봤던 기억. 하지만 이젠 너무 아련하다.
볼턴의 책을 읽으며 괴로웠던 건 그래서일까. 이게 다 fandango였고 risky theatrics였다는 것. 그래도 이건 볼턴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긴 한다. 그런데 너무 상세하고 그 설명 자체는 matter of factly 하다.
일본이 미국에 정교한 외교전을 펼친 단면도 중요한 부분이다. 싱가포르에 이어 베트남 하노이에서 2019년 2월 말 열린 북ㆍ미 정상회담 현장에도 취재진으로 있었다. 이제 고백하지만, 하노이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한 일본 외교관이 따로 차를 마시자고 청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기차를 타고 장장 60시간이 넘게 하노이로 향하고 있던 때였다.
그 외교관은 담담히 말했다. “이번 회담, 깨질 거야.” 싱가포르에 취해 하노이에 왔던 나는, 믿지 않았다. 회담이 깨지길 바라는 일본의 언론 플레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