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공연 직전엔 걱정도 생겼다. 공연 직전 주에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부친상(4월27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조문을 가서 본 강 단장의 얼굴이 얼마나 안 되었는지 안타까웠다. 아버지가 위독한데 그 전주엔 노이마이어 안무가와의 기자회견(4월 23일)을 진행하고, 공연은 예정대로 5월1일부터 나흘 간 진행 중이다. 강수진 단장에게 거듭 조의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5월4일 공연 커튼콜.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by Sujiney
울면서도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눈물이 줄줄 흐르는 이유는 뭘까. '인어공주'의 결말을 모르는 이는 없다. 후라운더와 세바스찬이 '언더 더 씨'를 부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말고, 진짜 동화 '인어공주'의 결말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인어공주 때문에 목숨을 구한 줄 모르는 왕자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속절없이 바라보다 물거품이 된다는 비극.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재해석한다는 것은 도전이다. 그 도전의 결과인 이번 무대는 알려줬다. 존 노이마이어의 천재성. 19세기의 덴마크 동화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보편성과 고유성 모두를 담보하는 무대로 풀어냈다. 모든 노력이 구원받지는 않는다는 것. 모든 사랑이 응답받지는 않는다는 것. 모든 희생이 보답받지는 않는다는 것.
무대 장치도 발군. by Sujiney
이 가슴아픈 메시지를 노이마이어는 모두가 아는 고전 동화를 통해 세련되고 아름다고 가슴 아프게 그려냈다. 천진난만한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은 직후 기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발가락이 몇 개인지 세보는 장면. 그런 인어공주의 진심은 모르고, 아니, 알려하지도 않고, 세속의 놀이인 골프와 연애에 골몰하는 왕자. 인어공주를 이상한 존재로만 여기고 귀찮아하는 공주와 그 친구들. 놀림의 대상으로만 삼는 왕자의 부하들.
노이마이어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도 이들과 다를 바 없음을. 진정 소중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왕자처럼, 진심을 모르고 허세만을 쫓아가는 하객들처럼, 우리도 어리석음을. 일본 분라쿠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인어공주의 꼬리 역할을 한 하카마 등에 대해선 이미 많은 해석이 나와있으니, 패스. 군무의 어리석음과 우스꽝스러움을 세련되게 풀어낸 안무를 보며, 노이마이어는 인류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데 아름답게 보이는 안무와 의상은, 이게 천재임을 웅변했다.
다시 읽은 <<인어공주>>
시인 캐릭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을 의미하는 이 캐릭터는 노이마이어 본인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인어공주와 시인이 함께 하나가 되는 것. 국립발레단 프로그램북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은 하나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노이마이어 역시 곧 '인어공주'이며, '인어공주'가 곧 노이마이어다.
노이마이어. 함부르크 발레단을 51년째 이끌고 있다. 한국에서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지난해 NBS(일본 공연예술협회 격)가 올해 초 함부르크 발레단과 노이마이어를 초청한다고 했을 때, 진지하게 비행기표를 알아보려 했던 까닭.
생각해보면, 노이마이어와 강수진 단장의 인연은 각별하다. 강수진 단장이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무용수였던 시절, 고국 무대에 올린 것도 노이마이어의 안무작 '카멜리아 레이디'였다. 당시 세종문화회관에서 그 공연을 보고 역시 눈물깨나 흘려서 기진맥진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존 노이마이어 & 강수진 단장. 출처 및 저작권 국립발레단
국립발레단의 이번 공연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강 단장은 국립발레단 수장이 된 직후부터 노이마이어의 공연을 올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노이마이어 감독은 이번 프로그램북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수진 단장은 <카멜리아 레이디>를 비롯한 내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국립발레단 단장 취임 직후 그가 처음 추진한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인어공주>였다. 그는 <인어공주>를 보기 위해 (미국) 워싱턴까지 올 정도로 큰 열정을 보였다. 팬데믹으로 제동이 걸렸던 논의를 다시 끌어올린 것도 그였다."
역시나. 이번 '인어공주' 공연의 산파 역할이 강수진 단장이었던 셈. 부친상이라는 궂긴 일에도 불구, 그가 내색않고 공연 진행에 힘쓴 까닭이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상. 출처 구글
세상은 추한 곳이다. 사람들은 어리석으며 서로를 미워하기 바쁘다. 희생도 사랑도 물거품이 되기 일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묵묵히 정직하게 살아가야 한다.
노이마이어는 이 작품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사는 거, 힘들죠. 그래도 묵묵히 정진해나갑시다." 값싼 위로도 아닌, 사탕발림도 아닌 이 솔직담백하고도 아름답고도 위트 가득한 비판이 녹아있는 이 작품을 보고 나니, 삶이 한결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