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2024년 봄 대한민국 서울에 살아 돌아왔다면?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터다. 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발레라는 형태로 다시 태어나 관객을 만났으니. 민간 발레단의 대표주자, 유니버설발레단은 창단 40주년을 기념해 5월 10~12일, 케네스 맥밀란 경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발레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매튜 본은 LG아트센터에서 5월 19일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렸다.
지난해엔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한국 관객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가까우면서도 나름의 자율성을 잘 살린, 맥밀란 경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초상화. 출처 위키피디아
'로미오와 줄리엣'이 대관절 무엇이길래, 500년이 지나도 이렇게 사랑받을까. 발레로 재탄생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 작품이 왜 고전인지를 증거한다. 고전은 왜 고전일까. 그 시대만의 공시적 특수성을 갖췄으면서도, 그 시대를 벗어난 통시적 보편성도 담보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드라마 발레계의 양대 산맥, 맥밀란 경과 존 크랑코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놓칠 까닭이 없다. 둘 모두 드라마 발레의 정수이되, 나름의 매력을 살린 같고도 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을 내놓았다. 전 세계 곳곳의 발레단들은 이 작품을 계속에서 무대에 올린다.
올리고 싶다고 해서 다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각 재단들이 승인을 해줘야 하고, 제작에도 관여를 하기 때문이다.
케네스 맥밀란 경(맨 왼쪽)과 '로미오와 줄리엣' 리허설 중인 마고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 출처 케네스 맥밀란 재단 홈페이지, 저작귄 Reg Wilson
맥밀란 재단은 특히나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캐스팅부터 리허설까지 모든 순간에 자신들이 개입하고 결정권을 요구해서다. 어찌 보면 공연을 하는 발레단으로서는 불만이 쌓일 모든 이유가 다 있다.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 이 작품이 그만큼 아름다워서다.
유니버설발레단의 2024년 창단 40주년 공연, '로미오와 줄리엣'. 출처 및 저작권 유니버설발레단
맥밀란 경만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빛나는 지점은 여럿이지만, 여기에선 다음 두 여성 캐릭터를 짚고 싶다. 먼저 1막과 2막에 시장의 거리라고 표현되는 부분의 할럿(harlot).
할럿은 극을 끌어가는 주요 역할이다. 출처 및 저작권 유니버설발레단
"거리의 여자"라는 뜻처럼, 할럿은 무대를 자유롭고도 왁자지껄하게 장악한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음악 중에서도 워낙 웅장하면서도 흥겨운데 살짝 정신없고 어지러운 부분. 할럿 여러 명이 몬태규 가문의 로미오와 두 친구 벤볼리오와 머큐소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다.
할럿이 있었기에 줄리엣도, 귀족 캐릭터들도 더 빛이 날 수 있다. 자유롭고 도발적인 캐릭터인 할럿. 어찌 보면 줄리엣보다도 더 매력적인 여성이 아닐까. 솔직하고 저돌적인 할럿은 매력적이다.
출처 및 저작권 유니버설발레단
두 번째 캐릭터는 레이디 캐퓰릿. 줄리엣의 어머니다.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현대 발레적인 해석에선 아예 조카인 티볼트와 불륜이라고 그려지는 인물.
티볼트의 죽음 앞에 무너지는 레이디 캐퓰릿. 이가영 솔리스트의 열연. 오픈 리허설 사진이다. 출처 및 저작권 유니버설발레단
맥밀란 경의 작품에서도 그런 여지는 충분하다. 티볼트가 로미오의 칼에 맞아 쓰러져 목숨을 잃은 장면에서 오열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조카가 죽었다고 해서 저렇게까지 오열을 할까 싶은 정도로 레이디 캐퓰릿은 목놓아 운다. 맥밀란 경 재단의 작품해설을 보면 레이디 캐퓰릿은 "overcome with grief" 즉 슬픔에 압도된다고 쓰여있다.
케네스 맥밀란 경 재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설명.
레이디 캐퓰릿은 정작 자신의 딸인 줄리엣에 대해선 그런 애정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런 대조가 더더욱 레이디 캐퓰릿이라는 캐릭터에 다층성과 입체감을 부여한다.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버전에선 사실 레이디 캐퓰릿의 존재감은 더 뚜렷하다. 아예 티볼트와의 불륜관계가 명시적으로 암시되기 때문. 레이디 캐퓰릿은 인물 해석으로 보면 주인공들보다 더 흥미롭다. 그 자신이 명문가의 안주인이면서도 본인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으며 주도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지, 발코니 파드되(위)와 기사들의 춤(아래). 출처 및 저작권 유니버설발레단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렇듯 다층적인 캐릭터와 메시지가 쌓여 작품성을 빛낸다. 개인적으로 레이디 캐퓰릿의 팬인 나는, 이번 유니버설발레단의 무대에서 이가영 솔리스트의 레이디 캐퓰릿으로서의 출연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레이디 캐퓰릿뿐인가. 이가영 솔리스트는 할럿으로도 열연했다.
맥밀란 재단은 할럿도 직접 캐스팅을 했는데, 발재간이 요란하면서도 대담하고 춤사위가 적극적인 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이가영 무용수는 무대를 단연 장악했다. 훤칠하고 뚜렷한 이목구비, 여기에 실력까지 시원시원한 이가영 솔리스트. 무대 위에서 할럿으로서의 이가영 솔리스트는 그야말로 할럿 그 자체였다. 그 시대의 여성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자유와 도발을 만끽하는 여자.
맞다. 고백한다. 이 글은 이가영 솔리스트에의 연서다. 귀족 가문의 안주인부터, 거리의 여자까지, 모든 캐릭터를 소화하는 이가영 솔리스트. 그를 '선생님'으로 불렀던 건 행운이다. 본진에서 작품반을 지도해 주셨던 이가영 선생님은 이제 무대에서만 만날 수 있다. 무대와 발레단에 보다 집중하기로 하셨기에.
발레에 좀 더 걸크러시 여성 캐릭터가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 그래서 더욱 이가영 솔리스트의 앞날이 기대된다. 뭔가,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21세기 한국 발레 작품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작품을 혹시라도 꿈꾸는 대로 쓸 수 있다면, 이가영 무용수를 꼭 무대에 모시고 싶다.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고전의 다양한 변주를 만날 수 있었던 2024년 대한민국 발레계.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제 6월의 국립발레단 '돈키호테'에 이어 가을엔 '라 바야데르'까지, 대작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