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보자. 당신은 발레 무용수를 꿈꾸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 장학금도 탔고, 모두가 선망하는 스승도 만났다. 그런데 그 스승이 이렇게 말한다.
"훌륭한 발레리나는 될 수 있겠지만,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어 주역으로 활약하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청천벽력 아닐까. 적어도, 오드리 헵번에겐 그러했다. 그에게 이 말을 해준 스승은 마리 램버트(Marie Lambert, 1888~1982). 폴란드에서 태어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Ballet Russe)에 합류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영국 로열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한 뒤, 발레 교육자 및 램버트 발레단을 세운 인물. 램버트는 발레 무용수뿐 아니라 교육자로도 매의 눈을 가졌다는 평을 받았다.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딱 봐도 엄격한 분이 마리 램버트. 출처 위키피디아 저작권 없음.
그런 램버트에게 오드리 헵번은 "주역으로 활약하긴 어렵겠다"는 말을 들었던 것. 이 말을 계기로 오드리 헵번은 프로 무용수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다고 한다. 대신 배우의 길을 걸었으니, 램버트가 아니었다면 '로마의 휴일'도, '티파니에서의 아침을'도 없었을 수 있다.
오드리 헵번의 아름다운 폴드브라. 출처 위키피디아
헵번에게 발레를 권한 건 그의 어머니. 1929년생인 그는 어린 시절 발레 교육을 받으며 발레리나를 꿈꿨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자라면서 이사를 했어도 발레 클래스를 꾸준히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어도, 발레는 계속했다고 하니 오드리 헵번 역시, 조금 송구하지만 발(레미)치광이 였던 셈.
예쁜 사진은 많이. 출처 위키피디아
물론 전쟁 중엔 발레 클래스가 한정적으로 열렸지만, 헵번은 쁠리에를 누르고 그랑주떼를 뛰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종전 후, 그는 다시 발레를 본격 수련한다. 그때 만난 인물이, 램버트.
램버트를 냉정한 선생님이라고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발레는 꽤나 요구하는 게 많은, 잔인한 예술이다. 주역으로 성공을 거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태생적, 시대적 한계가 있다면, 그리고 그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그 당시로서는 쉽게 찾아질 수 없다면, 정확하게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도 - 물론 애정을 담아 - 스승이 해야 할 일 중 하나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자칫 사랑은 집착으로 변하고, 원망과 회한으로 이어지므로.
램버트가 헵번에게 "주역은 될 수 없겠다"라고 말한 이유는 다음이었다고 한다. 첫째, 헵번의 키는 5피트 7인치, 약 170cm였는데 당시 발레계에선 2인무를 하기에 너무 큰 키였다. 당시 발레리노들의 키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 포앵트 슈즈, 일명 토슈즈를 신으면 더 커지는 상황. 21세기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았겠지만.
여러모로, 힘든 발레. 출처 위키피디아
둘째, 헵번은 전쟁 중 영양 불균형을 겪어 너무 말랐고 근력이 부족했다. 발레는 깡마르면 더 좋은 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발레는 사실 코어 근육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드리 헵번은 발레 무대가 아닌, 영화 카메라 앞에 서기로 결심한다. 그가 발레 및 춤에 대해 남긴 말들을 몇 가지 적어본다.
"나는 발레를 사랑했지만, 발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 "As much as I loved the art and discipline of the dance, it didn't love me!"
"얘야, 너의 마음껏 표현하며 춤추는 걸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마." "Darling, don't ever be too shy to dance your heart out."
"내가 아직 연기를 할 수 없었을 때, 연기를 해야 했어. '화니 페이스'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을 땐, 노래를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때였고. (저명한 무용수이자 배우인) 프레드 아스테어와 함께 춤을 춰야 했을 땐 춤을 제대로 출 수 없었어. 내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 그 모든 걸 해야 했어. 그래서 나는 미친 듯 노력해서 어떻게든 해내려 했어." "I was asked to act when I couldn't act. I was asked to sing 'Funny Face' when I couldn't sing, and dance with Fred Astaire when I couldn't dance - and do all kinds of things I wasn't prepared for. Then I tried like mad to cope with it."
몇 번이 제일 좋으신지. 맞다, 우문이다. 다 좋다.
클래스 중인 오드리 헵번. 출처 위키피디아
참고로, 마리 램버트 때문에 무용수 경력을 포기한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이 있으니, 프레데릭 애슈턴(1904~1988).
그는 에콰도르 태생으로 남미에서 성장하며 10대에 안나 파블로바의 순회공연에서 발레를 처음 접했다. "이걸 평생 해야겠어"라고 마음먹은 애슈턴은 모든 걸 버리고 영국으로 1921년, 17세의 나이에 건너가 램버트를 사사하지만, 램버트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발레리노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 늦었구나." 램버트는 대신 애슈턴에게 발레의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면서 안무가로 그를 이끌었다. 우리는 그렇게 애슈턴이 안무한 명작들, '고집쟁이 딸', '신데렐라' '실비아' 등을 보게 된 것.
오드리 헵번의 말처럼, 준비가 설령 되지 않았을 때 기회가 오더라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용기를 갖기. 아무리 좋아했던 것이라도, 때로는 체념해야 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껏 춤을 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