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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곳 없는 발레. 날 것의 나를 드러내는 용기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34회. 레오타드와 타이즈

by Sujiney

내 견갑골과 뒤꿈치, 광배근을 나보다 더 많이 보시는 분들. 발레 선생님들이다. 발레 클래스 때 가장 바쁘고 힘든 분들은 누굴까. 클래스를 듣는 나 자신, 이라고 자답하고 싶지만, 아니다. 정답은 선생님들.

선생님들은 나라 불문, 레벨 불문, 매 클래스 때마다 매의 눈으로 모두를 샅샅이 살핀다. 서울에서도, 도쿄에서도, 워싱턴 DC에서도, 파리에서도, 교토에서도 그러했다.

기본이 만들어져 있는 전공생 및 프로 무용수의 클래스는 다를 터. 기본이 몸에 새겨져 있으니, "아킬레스 건이 당길 때까지 바닥을 눌러야 진짜 쁠리에입니다"부터 "다리만 뻥뻥 차는 건 그랑 바뜨망이 아니에요, 탄듀와 데가제의 기본 동작을 다 거쳐 바닥에서 힘을 받아서 차야 해요"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을 것.


나 자신아 어깨 내리고 턴아웃 좀 하자. 세종발레디플로마 학기말 공연 대기 중.


취미발레 특히 성인발레인을 가르치는 발레 선생님들은 거의 매일 이 말을 목놓아 외친다. 발레 무용수뿐 아니라 성인 발레학원 선생님들 역시 극한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까닭.

발레조아의 정혜연 선생님과 박정빈 선생님, 정훈일 선생님은 바워크 때 한 명도 놓치지 않고 왼쪽에서 오른쪽, 또는 그 반대의 순서로 모두를 한 명 한 명 관찰하고 중심을 바로 잡아 주시거나, 근육의 쓰임새를 지적해 주신다. 발레썸의 최시몬 선생님은 포지션부터 턴아웃까지 절대로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비너스발레학원의 엄규성 원장님은 또 어떻고. 선생님께서 "등! 드으으응!" 하시는 통에 등을 잡느라 용을 쓰다 보면 클래스 후엔 등에 멍이 든 것 같은 기분.



"시도하고 노력하는 과정이 보여지는 걸 두려워마". 명언이로세. 출처 및 저작권 게이놀민든 인스타그램


이런 과정에서 깨닫게 된다. 선생님께 내 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의 중요함을. 발레에 진심이 되기 전까진 솔직히 몰랐었다. 왜 레오타드와 타이즈를 입고 신는지. 하지만 이젠 안다. 몸의 선을 감출 수가 없는, 그야말로 만두피 같은 레오타드를 입고, 다리의 뼈와 근육이 온전히 다 드러나버리는 타이즈를 신어야 하는 이유.


선생님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그 과정에서 선생님의 코렉션(corrections, 지적사항)을 받아들여 잘못된 점을 고치기 위해서다. 이미 다 만들어진 최고의 상태이기에 으스대기 위해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최선을 드러내고, 잘못된 점을 인지하고 인정하며 개선하기 위함이다. 나의 최선을 쌓아가기 위해서다.



급 자랑해보는, 박윤재 학생 사인. By Sujiney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출신인 김주원 발레리나는 MNet의 '스테이지 파이터' 심사위원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발레는 숨을 곳이 없어요. 다 드러나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각오와 용기. 남녀 불문 타이즈를 입는 까닭이다. 남자 무용수들의 발레 타이즈 희화화가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무대에 설 때는 다르다. 관객을 위해 쌓아온 최선을, 최고로 보여야 한다. 그렇기에 레오타드가 아닌 반짝이고 화려한 레이스와 보석이 촘촘한 튀튀를 입는 것. 그럼에도 하의는 타이즈를 입는 것. 숨지 않겠다는 각오다. 나의 최선과 최고를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평가를 받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착장이다.



관객을 향한 정성, 무대 의상. 출처 및 저작권 타일러 펙 인스타그램



전설의 발레리나, 알레산드라 페리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지난해 8월 도쿄 세계 발레축제에서 본 그녀의 무대. 그는 피부색 톤의 캐미솔 레오타드를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그의 나이 61세. 아름답지 않은가.

그가 과거 했다는 명언을 가져온다.

"예술가로서 나는 항상 벌거벗은 상태입니다. 무대 위에서건, 카메라 앞에 있건, 완벽히 벌거벗은 상태로 있을 용기를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지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술가는 정말이지 연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크나큰 힘을 갖게 됩니다. 극한의 상황에 익숙해지기 때문이지요."
원문 = “As an artist, I’m always naked. When you are on stage or before a camera, you must have the courage to be completely naked. This makes an artist really vulnerable, but also used to extreme situations, and, in a paradoxical way, gives us great strength.”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벌거벗은 상태. 그렇게 되기 위해선 용기와 수십 년의 훈련이 쌓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강해진다는 페리의 말.



알레산드라 페리. 출처 및 저작권 Vogue



무대에서 뿐 아니다. 발레 스튜디오에서도 마찬가지. 지난해 세종 발레 디플로마에서 학기말 공연으로 발레 클래스를 선보였을 때, 우린 신혜진 국립발레단 게스트 마스터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모두 검은색 기본 레오타드로 착장을 통일했다. 꽃무늬부터 기하학적 무늬는 물론 핑크와 보라, 그린 등 레오타드 숫자만 50벌이 넘지만, 가장 기본인 블랙 캐미솔.

관객에게 장식 없이, 꾸밈없이, 이게 지금의 저희의 최선입니다,라고 보여드리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부끄럽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이렇게 내 모든 치부가 다 드러나는구나.
하지만 연습을 거듭해 가면서 무서움은 조금씩 차분함으로 바뀌어갔다.
그래, 완벽할리 없지만 나는 그래도 매일 나름의 최선을 다했어.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관객께 그리고 존경하는 선생님께 보여드리자라고.

여전히 나의 턴아웃은 아쉬움 그 자체였으며 폴드브라도 시선도 아쉬웠지만, 그래도, 뭔가 벅참이 있었다.

그 바워크 공연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 45분만이 나를 바꾼 건 아니다. 지금까지 거쳐왔던 수많은 선생님들의 수많은 클래스에서 켜켜이, 차곡차곡 쌓아온 나만의 최선. 그게 쌓여온 것을 확인하고, 느끼고, 믿을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이는 경험. 인생을 바꾸는 이 경험. 발레 클래스여서 가능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선생님들께 내 견갑골과 내전근, 광배근 등등을 보여드려야지. 그리고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어가야지.

발레를 보고, 배우고, 느껴서, 감사하다.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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