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44회 = 반가워, 중심의 집
이 글을 쓰는 자금. 내 앞엔 이웃집 나무가 신록을 뽐내고 있다. 내 옆엔 오늘 동네 꽃집에서 배달해주신 라일락나무가 새 터전이 아직 닟선 듯 고개를 떨구고 있다. 내 뒤론 을지로에서 찾은, 작지만 어여쁜 샹들리에와 발레 옷장이 반짝반짝. 맞다. 여긴 나의 꿈의 집, 중심의 집이다.
발레를 배우며 인생의 바닥을 딛고 중심을 잡고 옮기려는 첫걸음을 위한 공간. 발레로 가득한, 연희동의 작은 집.
이렇게 쓰면 성공을 일군 여성처럼 들릴까 싶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 말이 있더라. 인생의 '반대의 법칙.' 부자가 되기 위해선 가난한 것처럼 살아야 하는 괴로움을 견뎌야 하고, 새로운 배움을 쌓기 위해선 "내가 이렇게까지 모르는 게 많구나, 바보같아"라는 자각을 해야 하고, 성공을 일구기 위해선 실패의 쓴 맛을 봐야 한다는 거다. 이 집의 빛을 만나기 전까지, 내 삶은 검고 검었다.
인생의 바닥은 다양한 속도와 형태로 온다. 이 집을 짓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바닥을 쳤을 땐, 롤러코스터가 아닌 늪과 같았다. 훅 떨어지는 게 아니라, 꼼짝없이 갇혀서 서서히 침잠하는 느낌. 발버둥을 치면 나만 힘이 빠질 뿐.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에 나를 온전히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그 침잠의 속도에 적응을 한 나머지, 편안함을 느꼈을 정도.
하지만 발레라는 동아줄을 잡으며 나는 깨달았다. 이 편안함은 위험하다. 바닥은 딛고 일어서는 것이지, 뚫고 나를 잡아끄는 것이면 안 된다. 위로, 더 위로, 힘들어도 위로, 올라가야 한다. 발레에도 '반대의 법칙'이 있다. 오른발이 나아갈 땐 왼팔을 들고, 축다리와 일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밀어내는 턴아웃 등등. 발레는 삶의 다른 이름이다.
이왕 태어난 것, 있는 힘껏 살아내야 한다. 불편하고 괴롭고 창피하고 어이없는 상황을 견뎌내야 한다. 삶은, 세상은 추하지만 그럼에도 절대적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내게는 그게 발레이자, 내 공간이자, 내 삶이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냈다. 헤어질 결심을 했다. 헤어지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나에게, 그 나를 만들었던 상황과 조건, 일과 열정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어서다.
용기를 내고 분연히 일어서면, 의외로 일은 착착 진행된다. 나는 결국, 내가 영원히 계속되리라 믿었던 삶의 방식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실, 유효기간은 한참 지나있었지만 내가 외면하고 있었던, 이미 끝나버린 삶. 내가 모르는 척 해도, 그 삶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 끝을 받아들이고, 헤어질 용기. 그 용기를 낸 게 2년 전 오늘. 이상도 하지. 그 헤어질 결심을 하기까지는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는데, 막상 실행을 하는데는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사이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처음엔 생각했다.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야. 다음엔 생각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구나. 이러려고 그랬나보다. 나는 결국 이런 사람인가보다. 나의 친구, 나의 연인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런 나 자신을 위한 터전을 짓자. 휘황찬란한 아파트, 필요없다. 최신식 김치냉장고, 짐일 뿐이다. 100만원을 호가하는 로봇청소기? 노땡큐. 나를 규정했던 것에 작별을 고하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고심했다. 그렇게 지은 집은, 발레와 책, 글, 음악,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다. 소중한 이 공간. 과거의 나를 묻고, 만들어낸 현재의 내가 살아갈 이 공간이 소중하다.
그리고 아래의 말을 떠올린다.
"한때 너의 모든 것이었던 사람, 순간, 삶의 방식 등, 너라는 사람을 만들었던 것들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떻게 할래? 그것들은 여전히 너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데, 너의 앞에선 사라진 거야. 그런데 말이지, 이런 거 아닐까. 우리는 그걸 잊어버릴 필요 없어. 무언가를 보내준다는 것, 작별을 고한다는 건 과거를 지운다는 게 아니야. 그 과거를 갖고 살아가는 거지. 그 과거가 짐이 된다는 게 아니라, 한때 너의 마음을 가득채웠던 그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하는 도구로서 말이야. 그게 진정한 힘이야. 상처가 있는데 아프지 않다고 괜히 씩씩하다고 꾸미는 거 말고, 용기를 갖고 그 상처를 인정하는 것 말야. 지금까지의 삶의 페이지를 덮고,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내는 용기. 때론 새로운 장을 여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조차도 말이지. 인생이란 저절로 치유되는 게 아니야. 앞으로 전진하는 것뿐이야. 우리도 그렇지."
헤어져야, 새로 만난다.
그렇게 새로 만난, 중심의 집.
소중하게 인연을 이어나가자.
집과, 그 집에 살아갈 나 자신과.
잘 부탁합니다, 중심의 집.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께요. 언젠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을 초대할 수도 있는 날이 오기를.
By Suji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