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사다가 혼났다, 왜 혼자냐고

덕질로 외국어 공부, 23번째 브런치

by Sujiney

참 야한 과일이다. 무화과. 無花果. 꽃이 없는 과일. 정확히 말하자면 그 자체가 꽃인 열매.


보드라운 식감의 과육 안에 핑크 알맹이를 품고 있는 과일. 이르면 9월 초부터 먹을 수 있는 무화과를 기다리는 건 여름을 견디는 맛이기도 하다. 9월 중순부터는 거의 매주, 동네 과일 가게에 들러 무화과를 산다. 문제는, 스티로폼에 담긴 무화과가 너무 많다는 것. 부지런을 떨며 먹어도 꼭 몇 개는 버리게 된다는 것. 한국의 실물경제는 아직 4인 가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 이번엔 안 사겠다 다짐을 하면서도 무화과가 놓여 있는 가판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제도 A3 용지만 한 크기의 스티로폼 박스에 담긴 무화과 25과의 가격을 묻고 있었다. 햇볕에서 선탠 아닌 노동을 해온 이들만이 가진 거룩한 주름을 목에 두르고 있던 사장님은 물었다.


“아니 왜 한 상자만 해요? 세 상자 다 혀.”

“그게, 제가 혼자여서요.”

“결혼을 왜 안 혔다? 쯧쯧.”


그렇게 7000원 무화과 한 상자 값을 치르면서 나는 사장님께, 대한민국에, 지구에, 우주에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우리 집 뒷산. 텀블러, 필요 없다. 잔 그대로 들고나가 150보. By SJ


해봤어요. 잘 안 풀렸어요. 사장님은 백년해로하세요. 전 괜찮아요.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꽤 걸렸고, 버리게 되는 무화과에겐 미안하지만.

이렇게 답하고 싶었지만, 안 했다. 그 사장님은 어쩌다 보니 그날 남은 무화과 세 상자를 빨리 처리하고 싶었을 따름이니까.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건 나 같은 비정상인이 아니라 사장님처럼, 견실한 기혼 유자녀 시민이라는 것도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팩트니까. 혼자라는 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만 유세 부릴 일도 아니니까.


서론이 길었다. 이게 다, 이병률 시인 때문이다. 아니, 출판사 문학동네의 카페 콤마 때문이다. 홍대입구역에서 나의 아지트 역할을 해주었던 그 카페가, 어느 순간 (여러 설을 종합하면 치솟는 임대료 때문에) 자취를 감췄을 때, 나는 갑자기 애인이 아무런 언질 없이 증발한 것 같은 상실감을 맛봤다. 그게 벌써 3년 전. 그러다 오늘, 동네를 좀 멀리까지 산책하다 만났다. 새로운, 한적한 골목에 문을 연 카페 콤마를. 해사한 미소의 직원이 "저번 주 다시 열었어요!"라며 반겨줬다.


카페 콤마 mon amour. By SJ


당장 들어가 서가에 꽂힌 책 중 가장 먼저 발견한 게 공교롭게도 ‘혼자가 혼자에게’였다. 이병률 시인의 책.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라는 근작을 읽다가 그야말로 미친x처럼 공공장소에서 운 적이 있어서 안 읽어야지 했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보다는 소설인 나라는 즉물적 인간에게도 이병률의 시와 에세이는 힘이 세다.


'혼자가 혼자에게' 중. 뒤에 와인잔이 보이는 건 착각! By SJ


아직 정리가 완벽히 되지 않은 관계 탓에, 아직은 무리이지만 정리만 되면 되도록 빨리 이탈리아로 떠날 작정이다. 어차피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여의치도 않은 상황이니 전화위복이라 생각하련다. 나를 아껴주는 친구들이 – 공교롭게도 다 한국이 버거워서 한국을 떠나 교토와 워싱턴DC에서 현지 남자들과 만나 잘 살고 있다 – 둘째 임신 소식이나, 첫째의 걸음마 소식을 조심스럽게 전할 때마다 미안하다. 나의 불행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전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소중한 친구들. 지금보다 갑절은 더 행복해지길.


그래서, 이번 주 외국어 덕질은 뉴욕타임스의 36 Hours 시리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왜 이탈리아인지, 앞의 글을 보신 분이라면 바로 아시겠지. 이탈리아 배우 겸 가수 미켈레 모로네(Michele Morrone)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미켈레 모로네는 참고로 무려 화사가 ‘상상 연애남’으로 꼽은 인물! 나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요.


화사씨, 미켈레 모로네 덕질 동지.


에헴. 취재원으로 알게 됐지만 존경하는 인생 선배이기도 한 전 주이탈리아 이 모 대사님께 들은 이탈리아 얘기가 고혹적인 것도 있다.


“프랑스도 아름답지요. 유적 하나하나를 다 가꿔서 멋들어진 관광지로 만들었죠. 하지만 이탈리아는 그렇게 하질 않아요. 왜? 그렇게 하기엔 유적이 너무 많거든요.”


1년간의 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는데 어떻게 쓸지 고민이라고 말씀드리자, 대사님은 이렇게 얘기하셨다.


“남들 다하는 대로 출세를 위한 미국 코스를 가실 수도 있겠고, 아니면 잊지 못할 인생의 찬란한 경험을 쌓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1년을 보낼 수도 있겠죠. 선택은 SJ의 몫.”


와우.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선 이탈리아에 약 4개월을 머무르지만, 나는 이왕이면 아래의 모든 곳들을 다 가보고 살아보고 싶다. 1년이 모자랄 듯.


바롤로를 다룬 뉴욕타임스 36 Hours 시리즈. [NYT 캡처]


36 Hours는 뉴욕타임스의 간판 여행기사 시리즈다. 한 여행지에서 시간이 제약되어 있을 때, 핵심만 추려서 갈 수 있는 곳을 소개했다. 하지만, 그 지역에서 반드시 봐야 하는 곳만 추린 관광 가이드라기보다는, 그 글을 쓰는 기자의 개인적 취향이 짙게 묻어난다. 미국 신문의 여행기사 및 비평 기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변잡기적 글쓰기. 내가 대단히 애정하는 글쓰기. 하지만 그렇게 쓰면 한국 언론사에선 ‘킬!’을 부르는 글쓰기.


먼저 36 Hours in 나폴리.

https://www.nytimes.com/2019/07/11/travel/what-to-do-36-hours-in-naples-italy.html


그다음엔 아말피.

https://www.nytimes.com/interactive/2016/04/21/travel/what-to-do-36-hours-amalfi-coast.html?action=click&module=RelatedLinks&pgtype=Article

로마도 물론 빼놓을 수 없지만, 워낙 유명하니 36 Hours 시리즈에선 패스.


여기도 꼭 가볼 거다. Barolo. 와인 애호가에겐 성지와 같은 곳.

https://www.nytimes.com/2019/11/07/travel/what-to-do-36-hours-in-barolo-italy.html


밀라노 역시 빼놓을 수 없지. 이 모 대사님에 의하면 여긴 사실 라틴보다는 게르만스러운 곳으로, 영어도 얼추 통한다고 한다. 간판도 독일어가 많다고.

https://www.nytimes.com/2019/05/09/travel/what-to-do-in-milan.html


볼로냐도 가야해.

https://www.nytimes.com/2015/10/04/travel/what-to-do-in-36-hours-in-bologna-italy.html


피렌체, aka 플로렌스(영어식)의 두오모 성당 옥상에선 준세이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https://www.nytimes.com/2014/09/28/travel/things-to-do-in-36-hours-in-florence-italy.html


이탈리아 공부도 시작하긴 했는데, 숫자에서 도통 진도가 안 나가 큰일이다. 하지만 미켈레 모로네를 보면서, 다시 불을 붙여야지. 애칭이 Miki인 이 남자가 출연한 넷플릭스의 ‘365dni(365일)’은 많이들 야한 영화라고만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다는 아니다. 이 영화가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넷플릭스 사상 최다 재생수를 기록했다는 뉴스 뒤엔 함의가 있다.


최근 한 프랑스 매체와 인터뷰 장면 캡처. 이런 표정을 짓는 186cm 초저음 인터뷰이라니. 난 못합니다 인터뷰. 감상을 하지.
저 표정 어쩔거야. 모 외교관에 따르면 이탈리아엔 이런 남자 천지라고. 빨리 갑시다 이를리.


이 남자 배우는 테스토스테론 그 자체다. 하버드대는 못 갈 것 같지만, 인터뷰에서 “이상형은 어떤 여자냐”고 묻자 “나보다 많이 아는 여자”라고 답할 줄 알고, 연하보단 연상을 좋아하는 누나만 셋 막내다. 언젠가 세계 진출을 목표로 어린시절부터 독학으로 영어공부도 했다. "I think every women are beautiful"이라는 문장도 그가 말하면 문법오류따위 눈에 안 들어옴.


4년간의 결혼 생활 후 이혼을 한 뒤 상심이 커서 연기 등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정원사로 취직했다가 ‘365일’ 출연 제의를 받았다는 스토리도 있다.


186cm에 굵은 저음 하드웨어도 물론 훌륭하지만, 자기의 첫 반려견이 죽자 이름을 가슴팍에 문신으로 새길 정도로 동물을 사랑하고, 자기의 두 아들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건 또 어떻고.


다 만들어진 이미지라고? 그럼 또 어때. 이 남자가 내 남자가 될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이 필요해


10월 3일엔 케이크를 한 조각 살 거다. 우리 Miki의 생일이니까. 그리고 무화과도 두 개 정도 꺼내서 와인에 곁들여야지. 바롤로산으로. 혼자이지만 풍성한 한가위가 될 것 같다.


모두들, 나름의 happy 추석 보내시길.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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