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었냐고 묻지 마세요

이것저것 두서無 외국어 by SJ . 26번째 브런치

by Sujiney

그제, 한 선배(라고 쓰기엔 그에게 너무 배운 게 없다)가 5년 만에 전화를 해선 대뜸 “잘 있었어?”냐고 물었다. 이렇게 답하면 어땠을까.


“못 있었는데요.”


십중팔구 아랑곳 않고 본인 용건을 얘기할 거라는 데 500원.

어차피 내가 잘 있었는지가 진심 정말 진짜 궁금해서 한 질문이 아니니까. 내가 다니는 회사의 각종 정보를 캐내기 위해 되지도 않는 질문을 속사포로 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아래 공식을 알게 된다.

어이가 있는 때<어이가 없을 때=일상다반사


그 사람도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위에서 쪼여서,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철판을 깐 거다. 이쯤 되면 불쌍한 거지, 그냥.


대충 “글쎄요” “그럴 수도요” “그렇지 않을까요” 등의 추임새로 답을 갈음하고, “음 근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로 화룡점정. 5년 만의 3분 대화는 그렇게 끝.


요즘 들어 가끔 드는 생각. 사람들에게 입이 없으면 좋겠다. 아예 없어지면 답답할 테니, 1주일에 하루 정도는 ‘입 안 여는 날’을 만들면 어떨까. 말하는 데도 에너지가 들지만, 듣는 데 소모해야 하는 체력과 정신적 열량 역시 상당하다.


이렇게 말할 자격은 사실, 내게도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놀라운 점도, 어이없는 점도 많은데 그중 자꾸 혼잣말을 하게 되는 건 좀 당황스러운 점이다. 게다가 마음속의 말이 남과 함께 하는 대화에서 혼잣말처럼 나올 땐 스스로의 인성을 되돌아보게 된다. 어제처럼.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자꾸 헛된 희망을 주려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나도 꽤나 오랜 시간 눈물 콧물 흘려가며 굳힌 결론이야. 너의 잣대로 그렇게 쉽게 판단 내리고 그걸 내게 강요하지 마.”


Oops. 마음속에서만 하려고 했는데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친구가 착해서 다행이지. 난 왜 이리 못 됐을까ㅠㅠ


오늘 아침 건도 있네. 요즘 이것저것 집수리를 할 일이 생기는데, 1인 가구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여럿이다. 우리 동네의 철물점 아저씨께서는 확고한 원칙이 있는데, 부재중인 집엔 절대 네버 에버, 아무리 집주인이 원하더라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물론 훌륭한 원칙이다. 단, 나처럼 일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갔다가 자정께 귀가하고, 주말에도 불규칙하게 일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원칙. 그런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혼자 사는 일하는 여자들은 집수리도 못하는 거야 뭐야!”


아 진짜. SJ 너는 인간이 덜 됐다.




이런 내게 그래도 “You are not alone”이라고 해줄 것 같은 왕언니가 한 명 있으니, 뉴욕타임스의 모린 다우드(Maureen Dowd)다. 적확하면서도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칼럼으로 퓰리처 상도 수상한 언니. 생긴 것도 무섭다(모린 언니가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ㅋ)


NYT 공식 사진. 속으로 "까불지 마"라고 하는 듯.


이 언니에게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Cliché (닳고 닳은, 식상한) 표현이지만. 이 언니가 자근자근 씹고 뜯은 인물 중엔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 이름을 다 써주지도 않았다. 그냥, W라고만 썼다. 그에겐 George W Bush라는 글자 13개가 차지하는 지면도 아깝다는 듯.


수년 동안 칼럼을 매주 써오다, 요즘엔 논설위원 특유의 감과 깊이를 살려 인터뷰를 주로 많이 한다. 인터뷰 시리즈 제목도 직관적이다.


WITH

이게 끝. 언니 역시 짱.


만나는 인물 클래스도 어마무시.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부터 넷플릭스의 최고경영자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 등.


개중 가장 재미있었고 (가장 길었던!) 일론 머스크 인터뷰는 여기

https://www.nytimes.com/2020/07/25/style/elon-musk-maureen-dowd.html


리드(기사의 시작)는 이렇다.


So how do the King of Mars, his Galactic Princess and their newborn son, X Æ A-Xii, spend a Saturday night holed up in their Los Angeles pad?

(번역) 그래서, 화성의 제왕과 그의 우주적 공주마마, 그리고 그들의 새로 태어난 아들은 토요일 밤을 로스앤젤레스의 거처에서 토요일을 어떻게 보낼까?



이렇게 시작한 길디긴 기사는 중간에 이런 Q&A도 선보인다. 질문 수준 보시라. 이 언니, 머스크에 대해 사전 리서치 수준이 남다르다.


Maureen Dowd: Earlier this month, on the day you found out you were richer than Warren Buffett, you sent him the YouTube clip from “There Will Be Blood” of Daniel Day-Lewis saying, “I Drink Your Milkshake.” (요약 번역: 당신 최근에 워런 버핏보다 더 부자 됐을 때, 약 올리는 트윗 보냈지?)

Elon Musk: I did that?! Deny! (번역: 내가 그랬다고? 아냐!)


기사는 이어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에 대한 그의 생각을 집요하게 묻기도 하고, 머스크의 여자 친구가 머스크를 놀리는 장면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끝은 이 Q&A.


(Dowd) You’d rather be a meme lord than a billionaire.

(Musk) Probably true. You know, you need resources in order to make life multiplanetary. That’s the reason I’m accumulating resources. But I don’t otherwise care about resources.

<번역>

다우드: 머스크 당신은 억만장자보다 사실은 움짤의 제왕이 되고픈 거 아닌가?

머스크: 아마 그럴지도. 있잖아, 다행성 인생을 즐기기 위해선 근데 자산이 필요해. 내가 자산을 모으는 이유는 바로 그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나는 돈에 관심이 없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완벽한 엔딩이다. 억만장자를 인터뷰하며 그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끌어내다니. 모린 다우드 만만세. 언니 무병장수 기원합니다. 죽을 때까지 글 써주세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 언니가 쓴 글 중에선 아래 글이 제일 좋다.

https://www.nytimes.com/2009/07/22/opinion/22dowd.html


2009년에 쓴 칼럼. 택시 기사들이 전화 통화를 하며 주행을 하는 것에 대해 아주 사적이고도 매우 가차 없이 비판을 해놨다. W의 언급도 없고 고매한 논쟁도 없지만, 뉴요커로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에 대해 썼다. 아마도, 그 주 칼럼 거리가 없었을 수도 있고, 칼럼을 마감하는 날에 마침 타고 온 택시 기사에 열이 받아서 원래 쓰려했던 주제를 바꿨을 수도 있다.


이 언니가 낸 책 제목은 무려 아래와 같다.


Are Men Necessary?

남자들이 필요해?


집수리를 할 때는 솔직히 필요한 거 같긴 한데, 뒤집어 생각하면 딱히 필요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남자들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자들을 ‘원하기’ 때문에 남녀와 LGBTQ들 모두 이 행성에서 공존 해갈 수 있는 거 아닐까?


Love Actually라는 20세기 최고 영화의 한 장면. 썸을 타는 회사 사장(유부남)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가 필요하냐고 묻자, 그의 불륜녀는 이렇게 말한다.


I don’t want something I need. I want something I want.

필요한 건 원치 않아. 내가 원하는 걸 원해.


불륜은 뼛속까지 싫지만, 이 불륜녀의 대사는 뼛속까지 스몄다.


남녀노소 LGBTQ 모두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By SJ

keyword
작가의 이전글너무 아픈 영화는 영화가 아니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