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선가.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아팠다. ‘보이즈 인 더 밴드(Boys in the Band).’ 넷플O스에 있다. 싸랑하는 J언니의 추천작.
영화 얘기 전에 please allow me to 잠시만 삼천포. (이 표현 알아두면 꽤 유용하다. Please allow me to 동사원형: ~하게 해 줘 라고 쓰고 ~할게 이해해라 로 읽는다)
기자를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기업 및 관계 쪽 높은 분들과 단톡방이 여러 개다. 자주 소통하는 곳만 따져도 30개가 넘는다. 내 핸드폰 배터리를 빨리 닳게 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 때문만은 아니다.
단톡방 성향도 좌우 스펙트럼에 넓게 분포해있다. 여기에서 오가는 말씀들에 아이디어도 많이 얻고, 응원도 받는다. 감사하다. 하지만 가끔 이런 경우도 생긴다.
내가 (어쩌다 보니) 최연소이고 유일한 여성인 방. 술자리를 잡자는 얘기가 오가는데, 안 내킨다.물론, 인이 박혔다. 별로인 대화에 적당히 맞추는 기술 정도는 a piece of cake(=식은 죽 먹기)이다. 하지만 때론 한계가 온다. 그래서 계속 어렵다, 죄송하다를 반복하는데 좌장 격인 분이 이런 메시지를(특정인 identification을 피하기 위한 약간의 각색 있음).
아쉽네요. 꽃이 있어야 술맛도 나는데.
왓?
지금이 1990년대인가요? 이럴 때 다른 남자 선배들은 네버 에버 안 도와준다. 단톡방에 흐르는 침묵. 나는 ‘기자인 나’의 본분을 잊고 욱 해버린다. 그래도 나름 20년 가까이 월급생활했다고 좀 억누르고 아래와 같이 답을.
어머,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몫까지 맛있게 드셔주세요^^
바로 탈퇴하고 초대 거절하기, 버튼을 누르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캡처의 시대다. 또다시 버릇없는 기자년이 될 수는 없지. 존경하는 마음을 가장할 때 보내곤 하는 충성 이모티콘까지 붙인다.
아 술 땡겨. 그래도 20대 초년병 시절처럼 룸살롱까지 억지로 따라갔다가 (출입처 여러 회사의 남자 선후배 동료들은 귀가 안 하냐고 눈치를 준다. 흥 내가 순순히 갈 줄 알고!) “왜 술 안 따르냐”라고 얘기 들었던 때도 있으니. 그때보단 낫잖아?
어차피 뭔 일을 하고 먹고살든지, ‘지X 총량 보존의 법칙’(저작권은 SJ)이 있으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앗살람 알라이쿰.
'환불원정대'캡처. 울지마요, 대신, 내가 안아줄께요.
꼭 내가 100% 나여야 할 필욘 없다. 적어도 밥벌이 전선에선. 월급의 많은 부분은 내가 나이기를 보류하기에 받는 대가 아닐지. 월급이 주는 안정성은 마약이다.
안정성에 중독됐다고 부끄러울 필요도 없다. 일부 start up 창업자들이나, 일부 586 정치인들은 월급쟁이들을 은연중, 때로는 대놓고 멸시하지.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마초 작가라 별로지만) 김훈이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적었듯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은 심정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거룩함을. 가끔 출근길에서 울컥한다. 바쁘게 출근하는 넥타이들과 하이힐들 사이에서. 이 사람들은 얼마나 스스로를 억누르며 밥을 벌고 있을까. 이런 매일의 수고를 멸시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Now, back to 영화.
줄거리는 간단. 7명의 게이들이 생일 파티를 위해 모였다가 서로에게 상처만 잔뜩 입히고 파티는 난장판이 된 채 끝나버린다는 것. 원래 연극이었다. 그래서인지 대사의 밀도가 높고 쫀득한데, 사정없이 후벼 판다. 1968년 오프 브로드웨이(상업화된 브로드웨이에 반기를 든 일종의 ‘인디 연극계’)에서 데뷔. 1970년 영화화. 그러다 2020년판으로 재해석됐고, 9월 30일 자로 넷플O스에 풀렸다.
모든 대사가 주옥같다. [넷플릭스 캡쳐]
J언니는 말했다. 비단 게이들에 관한 queer 영화가 아니라, 인간 모두에 대한 내용이라고. 이 남자들은 happen to be 게이이고, 게이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속이거나 남들에게 속이느라 힘들고 상처 받고 상처를 준다. 그걸 가감 없이, 불친절하도록 정직하게 보여주는 게 이 영화다. 강약 중간 약 따위 없다. 계속 강강강 강타의 연속이다.
영화는 계속 나에게 묻는다.
넌 기자라서 행복해? 넌 한국에서 여자로 살면서 행복하니? 결혼해서 좋았니? 좋았던 척하느라 힘들었지? 좀 솔직해져. 너는 결국 marrying kind도 아니었고, 기자라는 명함에 붙는 여러 가치들이 좋은 거였잖아. 글 쓰면서 먹고살 수 있는 안정적 직업이 어쩌다 보니 기자였던 거 아니니?
토종이면서 영어신문에서 10년 가까이 일했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내게 영어로 글을 쓰는 건 내 현실에서 탈출하는 해방구와 같았다. 행복했지만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싶지만 굳이 ‘가해자’라고 정의되어야 하는 이도 의도적으로 해를 가한 게 아니라는 현실. 나보다 공부 못하는 남자애에게 밀려서 부반장만 했던 기억. 그 애가 ‘해는 동쪽에서 뜬다’라고 말하듯이 “여자들은 명절 때 음식 하면서 많이 집어 먹잖아요? 근데 설거지 좀 하면 어때요?”라고 말할 때 부글부글했던 심정. 남들이 정해놓은 결혼 적령기를 두고, 쿨한 척은 다하면서 괜히 조바심 냈던 기억. 가장 한국 남자답지 않은 원석을 우연히 찾았다는 생각에 우쭐해버렸던 때. 그랬던 그 남자의 친척 어른이 최근 나에게 찾아와 “부인이 해주는 저녁밥을 먹고 싶었다고 하더라”라고 시혜를 베풀 듯 말할 때의 어이없음. ‘남성 연대 결성 보도자료’가 자꾸 내 e메일 함에 들어와서 지우기도 귀찮을 때.
1968년 초연했던 이 연극이 원작이다. [위키피디아]
이게 다, 내가 나를 외면했기에 내 발목을 스스로 잡은 결과다. 용기 있게 직시했어야 한다. 내 친구들처럼 스스로를 알고 태평양을 건너거나 현해탄을 건너 스스로 삶을 개척했어야 한다. 나는 솔직히 이 나라에 맞지 않다. 하긴 어디라고 다르랴. 지구엘 맞지 않는 거 같아.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의 주인공처럼 외계인 돌과 사랑에 빠지든가 해야지. 난 쎈 여자인 거다.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이 싫어하는.
환불원정대 포에버
그런데 우스운 것. 지금 내 삶이 난 견딜 만하다. 가끔 행복도 하다. 내 최대 장점은 영어도, 일어도, 활달한 성격도 아닌, 참을성이다. 발레도 내년이면 10년째에 접어든다. 해외 출장 아닌 이상 매주 5회 다닌 게 벌써 10년.
인생은 어차피 고통의 연속. 하기 싫은 걸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그럼 나도 모르게 조금 좋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기자 일을 사랑하게 됐다. 계속 다른 분야를 배우고, HEU와 한반도의 운명, 김정은의 가쁜 호흡을 고민하다가도 Futures가 주고받는 선물이 아닌 先物거래임을 알게 되는 등등. 계속 배울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 – 결혼이며 출산 등등 – 은 아직 잘 모르겠다. 불확실성 가운데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젠 연애의 남루함과 결혼의 비루함을 알았고, 그 전으론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출산이라는 축복은 내 인생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달콤 쌉싸름한 체념.
‘보이즈 인 더 밴드’는 2시간 2분짜리 영화다. 보는 데 24시간 걸렸다. 보다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끄기를 여러 번 해서다. 하지만 다 본 지금, 여러 대사 중에서도 나는 아래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If we could just not hate ourselves so much.”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래,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자. 스스로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도 없지만, 미워하면, 그냥 너무 외로우니까. 인생은 짧은 듯 길고 긴 듯 짧다. 보듬어주면서, 미소 지으면서 살아가자. 마이클 잭슨의 이 노래처럼. 가끔 너무 열 받으면 이 노래 무한 반복.
추석에 봤던 제인 오스틴의 미완성 소설을 토대로 한 영국 드라마 ‘샌디턴’엔 이런 대사가 나왔다. 돈 때문에 부유한 여자와 결혼하러 가는 남자가, 여주인공에게 하는 말.
"I’m my best self. My truest self, when I’m with you."
너랑 있을 때 나는 가장 훌륭한 내가 될 수 있어. 가장 진정한 내 모습이 될 수 있어.
BS다. Bull과 shit의 합성어. 진짜 사랑한다면 나의 the worst self 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인간은 간사해서, 사랑의 감정은 3년이면 끝. 그 사람 앞에서 항상 최고일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마라. 곧 그 사람 앞에서 트림도 할 것이고, 목이 늘어난 티셔츠도 입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좋은 것, 그게 사랑이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