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공주는 누가 봐도 피해자였고, 예뻤고, 피부도 하얗고, 노래도 잘했다. 우여곡절 끝엔 항상 잘생기고 부자고 말도 잘 타는 역시 피부 하얀 남자가 와서 구해줬다.
지금은 궁금하다. 백설공주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옥시토신 같은 일명 ‘사랑 호르몬’의 유효기간은 과학자들에 따르면 길어도 900일을 못 넘긴다.
아이들 때문에 or 체면치레하느라 이혼은 못해도 지지고 볶고 난리 부르스를 출 게 분명하다. 동화 주인공 아닌 사람이었다면.
왜 내가 그 사과를 먹어가지고 이렇게 됐을까, 왜 내가 거기에서 너를 발견해서 뽀뽀를 했을까, 너랑 사느니 그냥 천년만년 자는 게 낫겠다, 하며 땅을 치고 후회한다에 500원.
치약 짜는 방법부터 쩝쩝 먹는 소리까지, 사람들은 타인을 견디지 못한다. 그게 사람의 본성이고, 그래서 사회엔 윤리 도덕 등등의 장치가 설계돼 있다.
하지만 결국, 본성이 이긴다.
각설하고.
동화 in 현실인 영국 왕실 얘기를 꺼내느라 서두가 길어졌다. 199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파리에서 36세로 생을 마감한 다이애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겐 다이애너는 철없는 (그리고 가히 잘생겼다고는 하기 어려운) 찰스 왕세자의 불륜으로 고통받다가 삶을 마감한 비운의 would-be 왕비였다. 그러니까, 넷플릭스에서 절찬 스트리밍 중인 ‘더 크라운(The Crown)’ 시즌4를 보기 전까진.
다이애너와 찰스, 윌리엄 왕자. [다이애너 페이스북 팬페이지]
현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를 다룬다는 점에서 화제와 우려를 모두 모았던 ‘더 크라운’ 시리즈.
엘리자베스 2세가 왕위를 계승할 때부터의 이이야로 시작해 시즌4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번 시즌4는 특히나 전 세계에서 화제였는데, 마거릿 대처 전 수상과 여왕과의 대립부터 다이애너 왕세자비의 이야기까지, 핫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해서다.
고백하건대, 어렸을 때 다이애너의 결혼식의 풍성한 웨딩 가운과 7.5m에 달하는 트레인(train, 베일 뒤 꼬리 부분)이 나온 시사주간지 Time의 사진은 내 책상에 오래오래 붙어있었다. 윌리엄 왕자랑 결혼해서 다이애너를 시어머니로 모시고 싶단 생각을 안 해본 동시대 여성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이애너를 숭배하고 찰스 왕세자를 미워하며, 둘 사이에 끼어든 카밀라라는 정부(情婦)는 더더욱 미워하기로. 다이애너가 BBC 마틴 바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이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Well, there were three of us in this marriage, so it was a bit crowded."
“글쎄, 우리 결혼생활의 주인공은 (카밀라까지) 세 명이었어요. 그래서 항상 복잡했죠.”
인터뷰 원문은 친절하게도 BBC가 아래 링크에 transcribe를 해서 녹취록을 풀어놓았다인턴 힘들었겠다.
찰스 왕세자 공식 페이스북에서 카밀라와의 결혼 소식을 알리는 포스팅. '화나요'를 누른 사람도 많다. [페이스북 캡처]
그런데, ‘더 크라운’을 보면서 어째 좀 이상했다. 카밀라라는 여성, 그다지 예쁘다곤 할 수 없고, 유부녀에, 찰스 왕세자보다 1살 연상인 이 여성이, 글쎄 매력적인 거다. 인간적으로.
이 장면이 특히 그랬다. 시즌4의 마지막 10회. 다이애너가 홀로 미국 뉴욕 방문을 성공리에 마치고 대중의 환호를 받는 뉴스를 본 카밀라. 헤어지자고 말한다.
'더 크라운'은 영어 대사도 멋지다. 영어 자막 켜고 보는 걸 추천. [넷플릭스 캡처]
“If you care about me as much as you say you do, sir, you will let go of these ideas of breaking it off with Diana.”
네가 말하는 것만큼 실제로 나를 생각한다면, 다이애너와 연을 끊겠다는 생각들은 버려.
찰스가 말한다. 그래도 난 널 사랑하는데, 사람들도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알아줄 거야, 나와 함께 자유롭게 누가 보든 상관없이 행복하고 싶지 않은 거야 블라블라.
그러자 카밀라는 이렇게 답한다.
“I do. But I want to be humiliated and attacked even less. That’s what’ll happen if you put me in a popularity contest against her. I will lose. I am married woman. I’m an old woman. Nowhere near as pretty, nowhere near as radiant. Someone who looks like me has no place in a fairy tale. That’s all people want, the fairytale.”
물론 함께 하고 싶지. 하지만 그보다 솔직히 나는 모욕을 당하고 싶지 않고, 공격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 나를 다이애너와 인기 경쟁을 시킨다면 나는 모욕과 공격을 당할 게 뻔하거든. 그리고 내가 패배할거야. 난 유부녀에, 나이도 많아. 걔처럼 예쁘지도, 빛이 나지도 않지. 나처럼 생긴 사람은 동화엔 낄 자리가 없어. 그리고 사람들은 동화를 원하지.
와우.
이 확실한 현실인식과 차분함 무엇?
물론 픽션이지만, 상당 부분 현실에 기초한 드라마 아닌가. 이건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마녀 이미지와 다른 걸? 어떻게든 다이애너를 쫓아내고 왕비가 되려 했다는 세간의 평가와도 다르다. 그리고 카밀라의 다음 대사는 쿨함의 대못을 박는다.
“To be the protagonist of a fairy tale, you must first be wronged. A victim. Which, if we will go public, what we will make of her. In the narrative laws of fairy tales versus reality, the fairy tale always prevails. And she will defeat me in the court of public opinion. (중략) It’s the reality sir. She’s the future Queen. And I’m just…a mistress.”
동화 속 주인공이 되려면, 피해자가 돼야 해. 우리가 관계를 공식화해 버리면, 다이애너는 바로 피해자가 되겠지. 동화 vs 현실의 서사 기법에선 동화가 항상 이겨. 그녀는 나를 여론의 장에서 짓밟겠지. 그게 현실이야. 미래의 왕비는 다이애너이고 나는 그저 애인일 뿐.
콘월 공작부인이 된 카밀라. 최후의 승자일까. 영국 왕실 SNS에서 가져온 사진. [페이스북]
그래서 찾아봤다. 카밀라와 찰스에 대해.
둘의 관계는 1971년, 그러니까 찰스가 다이애너와 결혼했던 1981년보다 10년 전이다.
썸을 타다 결혼을 전제로 발전했고, 실제로 양가 가족들까지 만났을 정도로 진지한 관계였다는 게 정설.
카밀라 역시 blue blood, 즉 귀족의 피가 흐르는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문제는 찰스가 아버지처럼 따랐던 마운트배튼 경이 입대를 권하면서 발생 어딜 가나 그놈의 군대가 문제로군. 카밀라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버린다. 여기엔 여러 설이 존재한다고 한다.
위키피디아가 잘 정리해놓은 바에 따르면,
1) 마운트배튼 경이 자기 손녀딸을 찰스랑 결혼시키려고 카밀라랑 떼어놨다
2) 둘 사이를 왕실에서도 인정은 했지만 카밀라를 보고 ‘왕비 감은 아니다’라고 결정했다
3) 찰스의 외할머니가 스펜서 집안(다이애너)과 사돈을 맺고 싶어 했다
etc.
어쨌거나 저쨌거나. 카밀라는 앤드루 파커 볼스와 1973년 결혼을 하는데, 또 이 남자는 찰스의 여동생인 앤 공주와 사귀기도 했다 이건 뭔 막장.
그러다 마운트배튼 경이 아일랜드 반군인 IRA 테러로 목숨을 잃고, 무너진 찰스는 상심한 마음을 카밀라에게 달랜다. 앤드루 파커 볼스는 카밀라와 찰스 왕세자의 관계를 눈감아 줬고 그 대신 자기도 바람을 맘껏 피웠다는 설이 있고. ‘더 크라운’에도 찰스와 카밀라가 찰스의 결혼 뒤에도 계속 사귀는 것으로 나온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
실제로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는 찰스의 결혼 뒤 약 5년 간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현실로 착각한 전 세계 수많은 다이애너의 팬들이 카밀라에 악플 테러를 했다. 영국 왕실 인스타그램에도 카밀라에 대한 악성 댓글이 줄줄이. 악플 읽는 건 내 기사들에 대한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기에 생략.
"내일이면 신문은 다 당신 얘기로 도배가 되겠지"라는 대사를 읊는 찰스 왕세자 캐릭터 in '더 크라운.' [넷플릭스 캡처]
결국 카밀라=악마라는 공식은 단순한 팬심과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게으름의 결과였던 거다.
그리고 다이애너 역시 100% 피해자라고는 할 수 없다. 다이애너도 보란 듯 애인을 만나곤 했으니까. ‘더 크라운’ 대사 중에서 원문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게 있었다. “다이애너는 나이보다 어리고, 카밀라는 나이보다 원숙했다.” 그리고 찰스 왕세자는 나름의 성장 과정의 아픔으로 인해 다이애너보다는 카밀라가 더 맞는 짝이었던 거다.
최근 영국 텔레그래프의 아래 기사를 봐도 카밀라가 왜 찰스와 인연인지를 알 수 있다. 요지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에서 카밀라가 찰스의 조용한 보좌역으로 스타덤에 올랐다’는 것. 찰스보다 항상 한 발 뒤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 게 주목된다는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