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긴 여자가 되고 싶어

외국어 공부를 가장한 넷플릭스 리뷰 34번째 브런치 by SJ

by Sujiney

당대를 풍미한 프랑스 여배우 잔느 모로(1928~2017)에게 어떤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모로 양, 당신이 남자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유함인가요? 아니면 명예? 또는 권력?”


모로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니요. 그런 것들은 제가 모두 갖고 있습니다. 제가 남자분에게 바라는 건 단지 하나. 아름답게 있어주었으면 하는 것, 그것뿐이에요.”


'현금에 손대지 마라' 영화 속 잔 모로. [다음 영화]

일본 드라마 ‘아네고’에서 이 내용을 듣고 단박에 모로의 팬이 됐다. 아름답게 있으려면 금전적 여유도 있어야 하고 지력과 신체적 조건 등이 모두 갖춰져야 한다. 우문에 현답이다.


게다가 ‘아름다움’이란 으레 남자가 여자에게 기대하는 것. 질문한 남자 기자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인 셈.


생각해본다. 당신은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가 되고 싶은가. ‘아름다운 남자’ or '아름다운 여자'라는 드높은 목표는 차치하고, 나는 일단 이런 여자가 되고 싶다.


웃긴 여자.


꿈이야 많다. 예쁜 할머니 되기. 80세에도 발레 계속하기. 쓰고 싶은 글만 쓰면서 생계유지를 넘어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기 등. 하지만 원 픽은 웃긴 여자.


나름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며 정립한 나의 이 소중한 꿈을 얘기할 때면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진짜 웃긴(=이상한 or 한심한) 여자네, 라는 이들이 90%.

나머지 10%는 “아니 욕심이 너무 많으시네요”라고 웃는다. 10%에겐 적어도 전해진 거다, 내 저의가.

흐뭇하다.


남에게 웃음을 줄 수 있으려면 여러 조건을 갖춰야 한다. 유머 감각과 재치는 필수. 그러려면 사물과 사회에 대한 영민한 관찰력도 있어야 한다. 생활엔 여유가 없더라도 삶에서 유머와 위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남을 웃기려면 무엇보다 에너지도, 매력도 있어야 한다. 결국, 웃긴 여자란 아름다운 여자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꿈.


하지만 지난주, 나는 만나고야 말았다. ‘웃긴 여자’의 진정한 롤모델을.


프랜 레보위츠(Fran Lebowitz).


넷플릭스 ‘도시인처럼(Pretend It’s a City)’에서다. 1월 8일 풀린 따끈한 신작이다.

언니, 전 돈이 좋은데...[넷플릭스 캡처]


이 언니가 어떤 언니냐.


말발로는 은하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언니다. 이 언니의 속사포 발언만으로 30분짜리 7회 다큐멘터리가 꽉 찬다(용각산이라도 보내고 싶네). 신기할 정도로 지루할 틈이 없다. 영어 자막을 켜고 보면 안구 운동이 절로 될 정도.


이 다큐의 감독은 심지어 마틴 스콜세지. 봉준호 감독이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자신의 멘토로 언급한 그 전설의 감독이다.


1950년생이니 올해 만으로도 71세인데 이 언니의 발음은 적확 그 자체이며 논리는 정연, 흐름은 유려하다. 마틴 스콜세지가 그에게 질문을 하면 답을 하는 영상도 있고, 레보위츠가 지금까지 출연했던 토크쇼 영상도 일부 동원된다.


무엇보다, 웃긴다.



프랜 언니가 선사하는 웃음은 우스꽝스러운 분장이나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기 삶의 터전인 뉴욕과, 뉴요커인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하고도 통렬한 관찰과 직설적으로 비꼬는 농담을 제공한다. 이런 식.


“나는 있잖아 돈이 너무너무 싫어. 근데 문제는 뭔지 알아? 물욕은 엄청나다는 거야. (중략) 나는 뉴욕시 전체를 통틀어 최악의 부동산 매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라고. 내가 사잖아? 그럼 바로 아파트 가격이 내려간다니까. 내 이름은 말이지, 일명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레보위츠’라고.”


재미가 없다면 그건 전적으로 번역을 잘못한 내 잘못. 이건 어떠신가.


“뉴욕 지하철들은 항상 고장 수리 중이지. 얼마 전 집 근처 지하철역에 ‘한 달간 수리 들어갑니다’라는 커다란 안내문이 붙어있길래 이유를 읽어봤지. 그랬더니 글쎄, 역 표면에 강아지 벽화를 그려 넣기 위해서라는 거야. 아니 이게 말이 돼? 허구한 날 멈춰서는 지하철을 고치는 것도 아니고 뭔가 냄새가 이상한 역을 개비하는 것도 아니고, 벽에 강아지 그림을 넣기 위해서라고?”



그의 영어 표현은 표준 그 자체다. 발음과 발성이 좋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 목소리도 카랑카랑해서 영어 공부하기에도 최고. 유명하다는 말을 쓸 때도 흔한 ‘popular’ 또는 ‘famous’가 아닌 ‘revered’라는 표현을 쓰는 식. 그러면서도 대개는 쉽고도 명확한 표현을 사용한다. 작가 출신이라서 언어 구사에도 높은 기준을 갖고 있으니, 영어 공부에도 최적화된 콘텐트인 셈. 물론 한국어 자막도 훌륭하다.




호기심에 프랜 언니에 대해 더 알아봤다. 녹색 검색창에선 건조하게 ‘영화배우’라고만 나와있지만 이걸 이 언니가 들으면 펄펄 뛸 노릇. 스콜세지 감독의 워낙 절친 인터라 영화 ‘울프 오브 더 월 스트리트’에서 주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1000만 달러 벌금을 때리는 판사로 분하기도 했지만, 배우는 그저 재미일 뿐. 이 언니는 작가이자 유머리스트(humorist)다.


영화 '울프 오브 더 월스트리트'에 출연한 리보위츠. [넷플릭스 캡처]


이 ‘웃긴 언니’는 그러나 어렸을 때 “여자애들은 남을 웃기면 안 된단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털어놓는다.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동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는데, “너는 돈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도 돼, 나중에 누군가의 부인이 되면 그냥 된단다”라거나 “얘, 남자애들은 웃긴 여자애들 안 좋아하니 절대로 농담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고. 그는 결국, 고교 자퇴와 함께 집을 떠나기로 한다.


그렇게 뉴욕으로 건너왔고, 무일푼이었기에 택시 운전부터 시작했다고.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당당히 밝혔고, 당시 조금씩 글을 쓰면서 가장 핫한 예술가였던 앤디 워홀과 친해진다. 이후 책을 출간하며 스타 작가가 됐지만 어느 순간부터 ‘writer’s block’ 즉, 글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이후 public speaking을 통해 생계를 이어간다. Public speaking을 여기에서 한국식으로 공개 강연으로 번역하긴 껄끄럽다. 프랜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농담을 하고 좌중을 웃기게 하면서 통찰력을 선사하는 게 목적이지, 남을 가르치려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


그의 촌철살인 명언을 모아놓은 사이트도 여럿이다. WikiQuote도 그중 하나.

https://en.wikiquote.org/wiki/Fran_Lebowitz


젊은 시절의 프랜 레보위츠. 자신이 냈던 책 표지를 들고 있다. [넷플릭스 캡처]


프랜이 뉴욕과 뉴요커들에 대해 내놓는 촌철살인 해학과 풍자, 유머를 듣다 보면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뉴욕에 가고 싶어 진다는 것.


스콜세지가 묻는다.

"뉴욕에 왜 그렇게 다들 오고 싶어 할까?"

프랜이 답한다.

"왜냐고? 그냥, 뉴욕이잖아."


코로나19 팬데믹이 잠잠해지면 꼭 뉴욕에 가야지.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남성용 재킷을 입고 흰 셔츠에 청바지,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뿔테 안경을 쓴 프랜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뉴욕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통렬한 비판을 하는 건 그만큼 그가 뉴욕을 사랑해서다. 서울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비판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돌이켜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과 서울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을 하면 바로 매국노로 찍히는 이 사회 분위기가 나는 조금, 무섭다.


프랜 언니, 만수무강하세요.

그리고, 계속 웃겨주세요.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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