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년 전, 한 국내 영자신문의 수습기자였던 내게 첫 임무가 주어졌다. 짧은 영화 리뷰. TV 편성표 작성이 전부였던내겐 일대 사건이었다. 이름이 들어가는 바이라인(by line) 기사가 주어진 건 처음이었으니.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영화를 보러 갔고, 리뷰를 쓰려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영화가 재미있었던 게 문제였다. 리뷰를 하려면 “재미있었음. 끝”이라고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참 잘했어요”가 아니라, 뭐가 별로인지를 매의 눈으로 찾아내 지적질하는 게 리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온갖 잘난 척을 다해가며 리뷰를 낑낑대며 썼다. 이래서 별로, 저래서 별로라고 말이다. 다 쓰고 나선 심지어 잘 썼다고 우쭐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40년 경력의 미국인 편집국장이 내게 오더니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You, smarty-pants!”
의역하면 “에고, 이 잘난 척하는 꼬마 녀석아” 정도 되려나.
그리곤 “리뷰라고 반드시 지적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건 아니란다. 너의 독자는 인생에서 다시 안 올 몇 분을 들여 네가 쓴 글을 읽는 거야. 그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깊이 있는 해석을 전달해야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리뷰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나름 십 수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월급을 받아온 지금도 그렇다. 넷플릭스 리뷰도 예외가 아니지. 내가 잘난 척하며 재미가 없네, 연기가 별로네, 해도 누군가에겐 인생작일수 있는 것.
그럼에도 리뷰를 쓰고 리뷰를 읽는 건 때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거나, 내가 몰랐던 콘텐츠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결국 리뷰를 쓰다 보면 이런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뭐라고.
좋게 표현하면 자아 성찰이겠지만 사실 자기 비하에 가까운 심정이다.
그런데, 이 자기 비하를 코미디 소재로 활용해 대박을 터뜨린 인물이 있다.
데이비드 레터맨(David Letterman).
위키피디아의 데이비드 레터맨 프로필 사진. 할아버지가 되고부터 긴 수염을 길러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다. [위키피디아]
1947년생인 이 할아버지는 미국을 대표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토크쇼 진행자다.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지역 라디오 진행자 및 기상캐스터로 일하다 토크쇼의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위키피디아 등에 따르면 그는 일기예보를 하면서도 개그 본능을 감추지 못했다고. “와우, 이 구름이 드디어 세를 불려서 폭풍우가 되어간답니다 여러분. 축하할 일이죠?”라고 하는 식이었다고. 특정 연령대의 대개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이 기상 정보를 읊는 한국과는 판이한 스타일이다.
이름을 알린 그는 1980년대 ‘데이비드 레터맨 쇼’를 진행하게 되고, 이어 심야 토크쇼의 시조새가 된다. 1982년부터 진행한 ‘레이트 나잇 위드 데이비드 레터맨’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러다 2015년까지 토크쇼를 진행하다 은퇴를 선언.
현직 대통령 시절 레터맨의 쇼에 출연한 버락 오바마. 백악관 공식 사진작가인 피트 수자가 촬영한 사진. [백악관]
흑역사도 있다. 불륜.
방송국의 여성 동료와 불륜을 저질렀는데, 그 여성 동료의 남자친구인 그 같은 방송국의 (막장의 향기가 솔솔) PD가 “200만 달러 내놓지 않으면 다 까버릴테다”라고 협박을 한 것. 흥미로운 지점은 레터맨 자신이 2009년 이 같은 사실을 자신의 쇼 중간에 고백했다는 점이다. 곡절 끝에 감옥 신세가 된 건 협박범.
불륜 사건 이후 레터맨도 내리막. 2015년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토크 본능은 숨길 수 없는 법. 그는 넷플릭스라는 새 플랫폼을 시도한다. 2018년부터 시작한 시리즈로, 현재 시즌3까지 나와있다. 제목은 ‘오늘의 게스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데이비드 레터맨 쇼.’ 영어 원제는 ‘My Next Guest Needs No Explanation.’
제목이 뻥이 아니다. 게스트 라인업이 애들 말로 후덜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부터 조지 클루니, 멀린다 게이츠까지. 말 그대로 설명이 필요 없다.
언뜻 보면 레터맨은 꽤나 승승장구를 했다. 화려한 게스트 라인업이 증거. But 정작 본인은 스스로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고, 이를 개그의 소재로 삼는다. 위키피디아에서 그의 특장점을 ‘self-deprecation(자기 비하)’이라고 적어 놓았을 정도.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이지만 “그래요 난 이런 게 단점이지”라며 스스로를 유머의 소재로 삼는다는 점. 그게 레터맨의 미덕이자 롱런의 비결.
시즌1의 손님들인 조지 클루니와 버락 오바마. [넷플릭스 캡처]
오바마(시즌 1, 1회)를 초대해 놓고 그는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토크쇼에서 잘렸을 때는 말이죠.”
클루니(시즌 1, 2회)에겐, “내가 했던 그 형편없는 토크쇼를 하느라 결혼도 쉰 넘어서 하고 애도 하나밖에 못 낳았으니 얼마나 바보 같냐고.”
레터맨의 과거 토크쇼엔 특정 스타일이 있었고, 이건 미국식 토크쇼의 전형으로 굳어진다. 레터맨이 호스트로 앉아있고, 한 켠엔 밴드가 있으며, 레터맨은 그 밴드의 리더와 이것저것 농담도 주고받고 게스트의 긴장을 풀어주는 패턴이다.
게스트를 울렸다 웃겼다 하는 여전한 토크쇼의 달인, 레터맨. [넷플릭스]
그러나 넷플릭스에서 레터맨은 새로운 형식으로 진화한다. 밴드도 없고, 중간중간 다큐 방식을 차용한다. 오바마 편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의 뿌리를 탐구하고, 관련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식이다. 지난해 작고하며 미국 정계에 큰 울림을 남긴 흑인 인권운동가 존 루이스(John Lewis)를 직접 만나 인터뷰하기도 한다. 토크쇼와 다큐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겠다. 74세의 나이에 이런 새로운 도전을 계속한다는데 박수를 보낸다. 다큐와 토크쇼가 결합된 형식이니, 영어 표현을 익히는데도 꽤나 유용한 콘텐츠.
여기까지 쓰고 되돌아본다. 십 수년 전 나에게 애정 어린 야단을 쳐주었던 에디터는 이 글을 보고 뭐라고 할까. 조금은 나아졌다고 해줄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준 당신의 5분이 헛되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