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해버렸다. 변명의 여지가 1도 없는 실수. 기사를 썼는데, 참고 자료로 삼은 뉴욕타임스(NYT) 기사를 잘못 인용했다. 그러면서 온갖 잘난 척은 다하며 썼으니, 쥐구멍 플리즈.
“이래서 수면 내시경을 받은 날엔 기사 마감을 하면 안 되는 거야”라는 애먼 자기 합리화부터 “원래 그 기사가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고!”라는 말도 안 되는 화풀이까지 해봤지만 결국 얌전히 기사를 수정했다. 그리곤 3시간 동안 이불 킥.
물론, 이불 킥만 내내 하진 않았지. 넷플릭스 ‘파이어플라이 레인(The Firefly Lane)’도 binge watching(내리 보는 것) 했다. 시즌 1, 10회까지 갓 풀린 올해 따끈따끈 신작. 닮은 듯 다른 두 여성이 서로에 대한 우정, 때론 애증을 삶의 연료이자 안식처 삼아 살아가는 이야기다. 43세 동갑내기 털리 하트와 케이트 멀라키.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넷플릭스 공식 컷.
이불속에서 혼자 볼수록 함께 보고픈 이가 있었으니, 내가 엄마와 동생 다음으로 사랑하는 여자, ㅊㅅㅇ.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이 말은 남자들과, 남성적 가치로 성공한 일부 여성이 만들어낸 허구다.
엄마도 모르는 내 가장 아픈 비밀을 몇 가지나 알고 있는 그녀. 엄마가 걱정할까 말 못 하는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얼굴은 손예진보다 더 예쁜데 성격은 오드리 헵번이다. 내 못난 뾰족함까지 품어주는 친구. 첫 직장 영어신문에서 만난 우린 단박에 베프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뉴스룸의 인구 구성은 99%가 외국인 or 교포 or 해외파인데 우리 둘만 덩그러니 소위 ‘토종’이었다. 나이는 동갑에 같은 부서. 이건 거의 a match made in heaven 천생연분. 우린 둘만 아는 성문종합영어 농담이나, 콩글리시 흉내내기 등의 놀이를 하며 자지러지게 웃고 또 웃었다. ‘파이어플라이 레인’을 보면서 어찌나 이 친구와 수다를 떨고 싶은지.
드라마의 주인공 두 여자는 어찌 보면 상극이다.
먼저, 털리는 외모도 성격도 화려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아픔이 있으니, 가족의 부재다. 아빠는 처음부터 없었고, 히피 세대인 엄마는 “전쟁 반대”를 외치고 마약에 절어 사느라 자신의 딸은 내팽개친다.
다음은 케이트. 첫눈엔 재미없는 범생인 nerd 스타일. 잠자리 뿔테 안경에 고지식한 성품이지만 “너희들이 잘 자라도록 보살피는 게 내 직업이야”라는 전업주부 엄마가 있다. 무엇보다, 착하다.
이 둘이 서로 이웃에 살면서 10대부터 우정을 쌓아 나가는 게 스토리 뼈대다. 진부한 스토리라인일 수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현란한 구성 덕에 지루할 틈은 별로 없다.
당대를 풍미하는 방송인이 되겠다는 꿈을 품은 털리 덕인지 탓인지, 케이트 역시 같은 업계로 진출하지만 곧 둘의 인생 항로는 엇갈린다. 털리가 지역 방송국에 취직하고 케이트 자리까지 추천해 함께 일하는데, 이들의 상사인 핫한 PD가 분기점을 제공한다. 이후 케이트는 전업주부이자 엄마로서, 털리는 백만장자 스타 방송인으로 40대를 맞는다. 케이트가 이혼 때문에 상처 받을 때도 곁에 있어주는 건 털리.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여기까지.
케이트에게 "너에겐 가족이 있잖아. 그거야말로 중요한 성취야. 나는 겁이 나서 시도도 못했지"라는 털리. 케이트는 "난 용기가 있는 게 아니야"라고 답한다. [넷플릭스 캡처]
이런 멋진 대사는 보너스.
"결혼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게 아니야.
불행함을 나누기 위해서 하는 거지."
"우리 같은 사람들이 결혼해서 평범하게 살잖아?
그건 자살행위야."
"좋은 이혼이란 없어.
이혼은 그냥 이혼이지."
나는 백만장자도, 스타 기자도 아닌 데다 훌륭한 엄마까지 있었으니 털리와는 천양지차. 하지만 잘난 기자 일을 계속하느라 정신을 차려보니 이거 하나는 닮았다. 싱글이 돼버렸다는 거. 광고주님들, 제발 내 핸드폰에는 ‘육아 시간 단축해주는 찍찍이 기저귀’ 같은 팝업 광고는 띄우지 마시길!
반면 내 소중한 베프는 나와 다른 인생을 택했다. 너무도 멋지게 한국을 손절하고 미국에 정착해,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임신 중인 내 친구가 불안함을 털어놓을 때, 엄마가 못된 나는 미안하다. 케이트가 털리에게 하는 이 대사처럼 내 친구가 느끼고 있을까봐.
“너는 엄마가 아니잖아. 너는 몰라.”
"아니, 넌 엄마가 아니잖아. 넌 절대 모를 거야"라는 대사. [넷플릭스 캡처]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안다.
혼자 잘난 척에 아는 척은 다해가며 기사를 쓰는 나보다, 세 아이의 엄마인 네가 백만 배는 더 훌륭해.
한국이 싫다고 구시렁대기만 했을 뿐 떠나지 못한 나보다, 20대 후반 우리 단골 라멘 집에 키보다 더 큰 이민가방을 들고 나타났던 네가 2억 배는 더 멋져.
네가 사는 워싱턴 DC에 1박 3일이라는 미친 일정으로 출장 와서 혼자 온갖 바쁜 척은 다하는 꼴 보기 싫은 내게, 침대를 내어주고 소파에서 잠을 청하던 네가 나보다 20억 배는 더 따뜻한 여자야.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가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겪으며 내가 혼자 온갖 드라마를 다 찍고 있을 때, 새벽에도 “언제가 좋아? 통화하자”고 메시지를 계속 남겨준 네가 있어서 내가 어리석은 짓을 안 할 수 있었어.
덧.
‘파이어플라이 레인’의 핵심은 물론 여자들의 우정이지만, ‘기자’라는 일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준다는 점에서도 훌륭하다. 찾아보니, 역시나 이 드라마의 기반이 된 원작 소설을 쓴 크리스틴 한나는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관련 경력이 있다.
원작자 크리스틴 한나. 여러 책을 냈는데 그중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도 있다. [한나 홈페이지 캡처]
이런 뼈 때리는 대사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Journalism is not a job.
It’s a lifestyle.”
의역하자면 “기자는 직업이 아니야. 네가 사는 방식이지.”
주말도 없이 일하고, 가족보다 기사가 우선이며, 자기들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 그게 기자들이다. 한때 나는 잘난 척하며 “동종업계 연애는 절대 노!”라고 했지만 경험상 내가 틀렸다. 그나마 동종업계여야 이해를 구할 수 있을듯.
"네가 기자가 되고 싶으면 너 좋을 때만 일해선 안되지. 기자는 직업이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야"라는 대사. [넷플릭스 캡처]
혼자 진실을 고군분투해서 찾는다고 의기양양하지만, 진실은 오스카 와일드가 이미 100년도 전에 얘기했듯 “결코 순수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Truth is rarely pure and never simple).”
6화 즈음, 털리의 과거사를 취재하며 쾌재를 부르는 여성 잡지 에디터의 얘기가 나오지만, 그 과거사 역시 불완전하다. 케이트의 남편은 40대임에도 “기자로서의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의지로 가족을 내팽개치고 이혼을 결심하며 이라크 행을 택한다. 하지만, so what?
결국 떠오르는 건 영화 ‘곡성’의 이 대사다.
“뭣이 중헌디?”
다시 20대가 돼도 나는 10대의 꿈인 외교관 대신 역시나 기자를 택할 것 같다. 그러면서 혼자 세상에서 바쁜 척을 하고, 그러면서도 때로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며 이불 킥을 하겠지. 그래도 생각한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내 친구야.
선영아 사랑해.
작가 김연수는 '사랑이라니 선영아'라고 썼지만 난 너를 항상 이렇게 생각해.
추억 소환 광고.
다음 생엔 우리 꼭 일찍 만나자. 너를 하루라도 더 빨리 만나서 응원하고 싶어. 오늘도 사랑해.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