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세 언니의 베드신♡

외국어 공부를 가장한 넷플릭스 리뷰 37번째 by SJ

by Sujiney

설 당일 아침. 일찌감치 떡국을 끓여먹고 집 근처 카페에 둥지를 틀었다. 쓰고 싶은 글만 쓰는 몇 안되는 날 카페인 맘껏 음복하며 인생 걸작 넷플릭스 리뷰 브런치, 한식 세계화 및 북한 여성 엘리트에 대한 책도 쓰며 하루를 알차게 쓸 요량…이었으나 역시 인생은 서프라이즈로 가득.


연휴용 기사를 다듬고, 잡무를 처리한 뒤 이제 좀 써볼까 하는데 아뿔싸. 현재 시각 오후 6시 38분까지 소리 높여 서로의 인생 상담 중이신 분들 덕에 집중 불가. 남편부터(들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남편이 백퍼 잘못했다) 중2 아들(아빠 말 좀 들어라 이 녀석아), 미국에 사는 고종사촌(자랑질이 심한 듯)에 애 학원 선생님(설 선물 신경전이 심했던 모양)까지. 내리 5시간째, 데시벨은 살짝 줄었지만 같은 페이스로 속사포 수다를 떠는 대한민국 4050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 이 카페 오나 봐라.


한순간, 생각한다.

설 연휴, 고무장갑+앞치마+수다가 아닌 노트북+에코백+브런치 패키지인 나.

행 or 불행?


이쯤에서 떠오르는 노래. ‘I’ve Never Been To Me.’


직역은 불가능, 의역하자면 “내가 진정한 나였던 때가 없었어” 정도 되려나. 전 세계를 누비며 온갖 화려한 생활을 한 화자가, 평범해서 자신을 불행하다 느끼는 가정주부(로 추정되는) 청자에게 전하는 내용이다. 가사인즉슨.


“Hey lady, you lady, cursing at your life/You're a discontented mother/And a regimented wife (중략)/You know what truth is?/It's that little baby you're holding/And it's that man you fought with this morning/That's truth/Sometimes I've been to crying for unborn children/That might have made me complete/But I, I took the sweet life/I never knew I'd be bitter from the sweet/(중략)I’m all alone today.”


“지금 당신의 삶을 저주하고 있는 당신/불행한 엄마이고 갇혀있는 부인인 당신/(중략) 하지만 그거 알아요?/지금 당신이 안고 있는 그 아기, 당신이 오늘 아침에 싸웠던 그 남편/그게 진실이랍니다/나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눈물 흘리죠/나를 완전하게 만들어줬을 아이들/대신 나는 달콤한 인생을 택했고/그 달콤함 때문에 씁쓸해질 것을 몰랐어요/(중략) 오늘 나는 혼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2oSjhuIb6Us

Charlene의 명곡 공식 뮤비다. [유튜브]


그래도 아직 나는 철이 덜 들었는지, 혼자라서 주어지는 씁쓸한 달콤함이 더 좋다. “가족이 최고의 축복”라는 페이스북 포스팅엔 ‘좋아요’를 힘껏 누르지만. 어차피 나는 이 사회의 돌연변이.


서론이 (언제나 그렇듯ㅠ) 길었다. 설 연휴를 만끽하는 방법 중 하나는 넷플릭스 binge watching(내리보기)이 아닐까 싶다. ‘승리호’부터 ‘브리저튼’까지 신상 콘텐츠가 넘치지만, 이번 설엔 tried and trusted 이미 증명된 이 시리즈를 다시 보기.


‘그레이스 앤 프랭키(Grace and Frankie).


늙어서 혼자인 게 최고 두려운 내게, 전통적 의미의 가족은 족쇄이지만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는 원하는 내게, 70대가 돼도 여자이고 싶은 내게, 이만한 시리즈가 있으랴.


'그레이스 앤 프랭키' 공식 포스터.

제목은 여성 투톱 주인공 이름. 그레이스는 제인 폰다(1937년생,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에게 감독상을 수여한 바로 그 전설의 여배우님), 프랭키는 릴리 톰린(1939년생, 한국엔 덜 알려졌지만 연기력과 말발로 은하계 최고 수준)이 연기한다. 80대이지만 어르신 아닌 그냥, 어른이다.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모두 비정형(atypical)한 공동체 소속이다. 우선 그레이스와 프랭키. 각자 남편인 로버트와 솔과 나름 전형적 가족을 꾸리며 살아왔다.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아이를 낳거나 입양하며 나름 장성할 때까지 지지고 볶고 나름 잘 살아냈다, 그런데. 두 부부가 함께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청천벽력이 떨어진다. 남편들끼리 서로 손을 붙잡더니, “실은 우리 사랑하는 사이야”라고 폭탄선언. 원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졸지에 집에서 나앉아 여름 별장에서 한 지붕 생활을 하게 된다.


맞다, 막장.


남편들끼리 바람이 나서 홀로 아니, 둘이 남겨진 그레이스와 프랭키. [넷플릭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진짜 미덕.


이 드라마엔 막장의 핵심 ‘김치 싸대기’도 없고 대성통곡도 전무.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어이상실 상태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드라마 아닐까.


인생은 어차피 어이상실의 연속이렸다. 요즘 최애 이모티콘 캡처.




성격이 정반대인 둘은 티격태격 한 지붕 라이프를 시작하는데, 이때가 코미디&드라마 물로 발전하는 지점.


완벽주의자 그레이스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프랭키의 좌충우돌, 여기에 내공 만렙인 대사에 웃음 포인트가 빵빵 터진다. 연기력은 기본. 게이 남편들(왕년 스타 배우 마틴 쉰이 로버트 역이다) 뽀뽀도 자연스럽다.

"나랑 결혼했었던 것만으로 당신은 세상의 모든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어"라는 게이 남편 feat. 마틴 쉰. [캡처]


그레이스와 프랭키는 결국 찐 우정관계로 발전하는데(실제 제인 폰다와 릴리 톰린도 베프다), 이 와중에 “시니어 여성을 위한 손목 통증 방지용 바이브레이터”까지 공동 개발하기에 이른다. 언니들 최고, PD도 최고, 작가는 더 최고!


그러면서 이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묻는다.

“네가 생각하는 정상, 그게 진짜 정상일까?”




이 시리즈의 미덕 펀치는 끝이 없으니, 코미디+드라마에다 로맨스로도 발전한다. 이쯤에서 이들이 80대라는 점을 잠시, 상기드린다.


프랭키도 로맨스에 빠지지만 아무래도 눈을 더 끄는 건 그레이스.


사업으로 만난 부호 기업가 (게다가 수년 연하) 닉이 대시를 해오는 것. 보실 분들을 위해 결론은 함구하겠지만, 둘의 베드신까지 있다는 건 안 비밀. 시즌6의 한 에피소드 소개를 보면 그레이스가 닉과 “거사를 치르는 중 하품을 해서” 고민을 하는 내용까지 있다. 80대 여성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다니, 이럴 때 느낀다. 그래도 아직은 미쿡이 선진국이구나.

요약하자면 "난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당신은 내게 (그렇지 않음을) 매일 보여줬지." 최애 장면. [넷플릭스 캡처]


노인 복지 문제 역시 정면으로 다룬다.


도보 속도가 젊은이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는 시니어들을 위해 횡단보도 녹색등 시간을 늘리는 캠페인을 하거나, 무릎 통증 때문에 변기에서 일어나기 힘든 시니어들을 위한 장치를 개발한다거나 등등. 한때 동방예의지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선 ‘어르신’ 세 글자로 단순화되는 이들을 두고, 이토록 다채로운 로맨스와 드라마물을 만들다니, 기립박수.


그레이스의 두 딸 역시 주요 캐릭터로 나오는데, 역시 일반적 ‘효녀’ 스타일과는 안드로메다쯤 떨어져 있다. 술을 좋아하는 그레이스에게 “엄마, 미안하지만 대체 몇 잔이나 마셨길래 그런 엉뚱한 결정을 내린 거야?”라고 묻는 식.


개인적으론 맏딸 브리안나의 팬이다. 예쁘고 잘나서? 천만에. 패션잡지에 나오는 것보단 통통하고, 성격은 까칠 잇셀프인 데다 매사에 비뚤고 냉소적이다. 그런데도, 보다 보면 팬이 된다. 구글링을 하면 “브리안나가 ‘그레이스 앤 프랭키’의 진짜 여왕인 이유”라는 포스팅도 나올 정도.


"엄마, 미안한데 대체 얼마나 취해있었던 거야?"라는 브리안나(오른쪽). 손에 든 건 오렌지주스 노노. 미모사 칵테일이올시다.[넷플릭스 캡처]


여기에다 한반도 사람들에겐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으니, 북한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 “얘 너네 아빠에게 북한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해라. 얘기가 길어지니까”라던가 “언젠가 남한과 북한(The two Koreas)이 사이가 좋아질 수 있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라던가 하는 대사들이 대표적.


상견례 자리에서 북한 얘기가 나오자 "얘 네 아빠에게 북한 얘기 시작도 못하게 하렴"이라고 했다가 대화가 이상해지자 "북한, 뭐 그 김정은인가 얘기 어때?"라는 장면. [캡처]


막장극 대신 성숙한 어른의 좌충우돌을 진솔히 그려낸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시즌6까지 승승장구한 이 시리즈는 올해 공개될 시즌7이 마지막이다ㅠㅠ

눈물의 마지막 시즌 공개 전까지는 시즌1~6을 아껴서 야금야금 볼 작정. 언니들의 만수무강 무병장수를 빌며.


80대에도 그레이스처럼 우아하고, 프랭키처럼 즐거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싶다. 약 반세기 후, 카페에 앉아 남편 욕을 하기보단 예쁜 속옷을 디지털 장바구니에 담는 섹시한 할머니가 되어 있길.


어르신 말고 그냥, 어른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전에... 떡국 살이나 먼저 빼야겠다ㅠ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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