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면, 바이탈 사인(vital sign)이 멎었다. 약 3주 전 심장마비로 쓰러지신 뒤 의식 불명 상태로 중환자실에 계셨다. 담당의는 “심폐소생술 하시겠습니까”라고 말은 하면서도 눈으론 “하지 마세요”라고 전하고 있었다. 희망은 없다는 뜻. 심폐소생을 하면 흉골이 손상되기에 권하고 싶지 않다고, 에둘러 전해온 터였다. 머리로는 동조했지만 마음은 ‘혹시나’. 의사 5명이 번갈아 가며 최선을 다했지만 바이탈 사인은 직선을 유지하다 멈췄다.
그 후엔 생각이 잘 안 난다. 미덥지 못하지만 그래도 맏이인지라 여러 일을 진행시켜야 했고, 먼 길 와주신 많은 분들을 맞이하며 시간은 날아갔다. 실감한 건 화장장에서.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문 안의 뜨거운 불길 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보면서다.
다시는 아빠와 싸울 수 없고 아빠를 미워할 수 없구나. 한 시간쯤 멍하게 있자니 다시 문이 열리고 몇 줌의 재가 된 아빠가 나왔다. 더 멍해졌다.
사람이란 거, 인생이란 거 진심 덧없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나 자신도, 결국은 다 저렇게 먼지가 된다.
근작 ‘힐빌리의 노래’, 넷플릭스에서 볼까 말까 망설였다. 가족이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직시하기 싫어서였다. 미국 백인 중산층의 붕괴를 적나라하게 그린 이 자전적 소설을 두고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단임으로 (할렐루야!) 임기를 마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왜 가능했는지를 설명하는 텍스트로 해석하는 게, 일단은 지배적. 거칠게 요약하자면, 무력해진 백인 중산층의 분노를 트럼프가 자극했고 그 덕에 득세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부모로 인해 고통받는 자식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숨쉬며 존재하는 이상, 가족이란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지독한 족쇄가 됨을 덤덤히 보여준다. 영화의 미덕은 이 족쇄의 사실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포용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데 있다.
두 배우의 명연기에 갈채를 보낸다. [영화 공식 스틸컷]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삶이라는 건 너무 무겁다. 그래서 술에 기대고 마약에 기대고 남자에 기대다가 삶이 망가진 여자. 그 여자가 하필 주인공의 엄마다. 잘 살고 싶은데 그 방법은 모르겠고 사는 건 너무 힘드니 값싼 위로에 무너진 존재. 아들에겐 미안함을 짜증과 분노로 포장해 감정을 터뜨린다. "내가 한 유일하게 가치있는 일은 너와 네 누나를 낳은 거란다"라고 하면서도 결국 다시 마약에 기대고 만다.
그 엄마라고 해서 아들의 장래를 망치고 싶었을까. 그냥 포기했던 거다. 성장한 아들은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또 마약으로 무너진 엄마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엄마, 지금 곁에 있어달라고 하시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말이죠, 엄마를 사랑해요. 포기하지 말아요.”
넷플릭스 캡처. 남주가 "내 가족은 완벽하진 않지만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존재야"라고 말하는 장면.
‘힐빌리의 노래’는 극단적인 케이스. 그래도 많은 자식들은 보면서 일정 부분 자신의 부모를 떠올릴 터다. 부모님을 생각할 때 따스함과 애틋함과 감사함만이 철철 넘친다면 당신은 분명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
잠시 딴 얘기. 친한 친구인 영국인 A가 알려준 시가 있다. “나는 아이는 절대 안 낳을 거야”라면서. 겉으로 보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존재인 그에게도 부모라는 존재는 무거운 족쇄다.
This Be the Verse
By Philip Larkin
They fuck you up, your mum and dad. / They may not mean to, but they do. / They fill you with the faults they had / And add some extra, just for you.
그들은 널 망쳐놓지, 네 엄마와 아빠 말이야. / 그들이 그러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야 말아. / 자기들의 실수로 너를 꽉 채우는 것도 모자라 / 몇 가지를 더해서 말이야, 너만을 위해서.
But they were fucked up in their turn / By fools in old-style hats and coats, (중략)
하지만 말이지, 그들도 역시 망쳐진 존재들이야 / 고루한 바보들에 의해서 말이지
Man hands on misery to man. / It deepens like a coastal shelf. /Get out as early as you can, / And don’t have any kids yourself.
인간은 자신의 절망은 다른 인간에게 전하는 존재야. / 연안 대륙붕처럼 그 절망은 더 깊어질 뿐이지. / 그 절망에서 어서 빨리 뛰쳐나와, / 그리고 너는 아이를 갖지 마.
출산과 육아에 대한 fairy tale 같은 스토리가 넘치지만 사실 부모 자식은 전생의 원수라는 말도 있듯. A가 알려준 이 시는 대다수 인간에게 소구력을 갖지 않을까. 적어도 태어나 숨을 쉬고 있는 이상,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니까.
다시 아빠 얘기.
좋은 딸은 못 됐지만 아빠를 좋아했다.
좋아하니까 미워도 했던 거 아닐까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빠는 영어와 일본어를 잘했고, 출장을 다니며 일제 헬로키티 볼펜이며 미제 노트를 사다줬다. 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했던 영어 소설책 뒤엔 멋진 사인도 적혀있었고, 내가 수학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얘기하면 아빠도 그랬다고 맞장구 쳤다. 한국에서 제일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학교의 최고 학과를 졸업했던 아빠. 사실은 많이 자랑스러웠다.
아빠는 전공과 무관한 무역 일을 했는데, 아빠의 아빠, 즉 내 할아버지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었다고 했다. 한국전쟁 와중에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생활고에 시달렸던 할아버지. 뒤늦게 공부해 어렵게 판사가 됐지만 학력 콤플렉스가 심하셨는지, 당신의 한을 풀기 위해 7남매 중 공부에 소질이 있던 아빠를 콕 찍어 법대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아빠도 아빠의 아빠가 원망스럽고 미웠을 터다.
그래서인지 내겐 '안 된다'는 얘기를 잘 안 했다. 아빠도 어쩔 수 없는 여러 상황 때문에 내게 미안한 게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빠의 아빠에 대한 반발도 있었을 터. 내가 기자가 되겠다고 하자 (실망했던 건 분명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러냐"고만 했다.
하지만 수습을 면하고 첫 기사를 썼을 때, 아빠가 액자를 하나 들고 왔다. 하찮은 내 기사가 마치 작품인양 예쁜 액자로 만들어준 것. 무심한 듯 "뭐 이런 걸"이라고 했지만 좀 더 격하게 좋아할 걸. 지금도 내 방에 걸려있다. 이후에도 아빤 내가 주요 기사를 쓰고 칼럼을 낼 때마다 문자로 반드시 소감을 보내주곤 했다. 칭찬인지 지적인지에 따라 내 기분도 왔다 갔다. 그립다.
아빠 장례식 생각을 하다 보니 넷플릭스에선 이런 뉴질랜드 다큐도 만났다. ‘캐스킷티어(The Casketeers)’.
[넷플릭스 캡처]
오늘의 인기순위 탑 10에 들어갈 가능성은 솔직히 희박해 보이는 시리즈다. ‘관(棺)’을 의미하는 casket+소설 ‘삼총사’ 중, ‘총사’에 해당하는 ‘musketeers’를 합성한 말. 굳이 번역하자면 ‘관총사’ 정도 되려나.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장례업자 얘기다. 한국어 제목은 '티페네 상조 사람들.'
이들에게 장례식은 축제다. 마오리족의 왕족부터 갓난아기까지, 많은 존재의 마지막을 보내주면서 이들은 많이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거든요”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표정은 담담하다.
"(장례식장엔) 웃음과 눈물이 넘쳐나죠"라는 'The Casketeers'의 주인공. [넷플릭스 캡처]
하긴 우리도 장례는 축제의 장이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도 있지 않은가. 10여 년 전 취재했던 장례 문화 전문 박물관인 ‘쉼’을 취재했을 당시, 관장에게 들었던 말.
“우리 선조들에겐 장례는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어요. 그러니 축하를 해야 하는 거죠. 문상객의 주요 임무가 재미있는데요, 상주를 웃게 하는 거였어요. 슬픔에 싸여있을 수밖에 없는 상주에게 기쁨을 주는 거, 그게 우리 장례 문화의 핵심이랍니다.”
이건 당시 기사 링크. 에디터가 붙여준 헤드라인이 더할 나위 없이 딱이다. "In the midst of death, let's have a pa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