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건 마클에게 ‘더 크라운’을 권함

외국어 공부를 가장한 넷플릭스 리뷰 41번째 브런치 by SJ

by Sujiney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


대다수의 동화들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런 동화가 필요한 이유. 현실이 팍팍해서다.


현실은 대개 이렇지.

오래오래는 살았어도 행복하게는 못 살았습니다.


고(故) 다이애너비와 찰스 왕세손의 둘째 아들 해리의 부인, 메간 마클이 폭탄을 터뜨렸다.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다. 관련 내용은 이미 익히들 알고 계실 터. SNS까지 죄다 메건 마클로 도배가 된 지 오래인지라 살짝 짜증까지 나려고 할 정도,라고 쓰면 PC(politically correct) 하지 않은 거겠지.


메건 마클 & 오프라 윈프리. [CBS 캡처]


메간 마클은 오프라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As Americans especially, what you do know about the royals is what you read in fairytales. (중략) It’s easy to have an image that is so far from reality.”

“미국인들이 특히 그렇듯, 왕족들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동화 속 얘기가 전부다. (중략)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이미지를 갖기 십상인 거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My story) is greater than any fairy tale you’ve ever read.”

“내 이야기는 당신이 읽은 그 어떤 동화보다도 더 위대하다.”


음 근데, 여기서 잠깐, 이라고 하고 싶은 건 나뿐? 니들만 힘드냐


물론 메간 마클이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적 언사는 부당하다. 논란의 여지없음.


But 1981년 생으로 올해 만 40세(공자님 말씀에 따르면 불혹, 흔들리지 않을 나이)인 데다, 영국 왕실이 맞아들인 며느리로서는 최초로 1) 흑인 혼혈 2) 이혼 유경험자 3) 미국 국적인 그가 하는 말로는 과하게 naïve, 순진한 것 아닌가.


첫째 아들 아치를 막 출산한 메건 마클과 해리 왕자. [영국 왕실 공식 사진]


마클은 또 자신을 안데르센의 동화에 기반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의 주인공인 에어리엘(Ariel)과 비교했다. 윈프리에게 그는 “어느 순간 ‘인어공주’가 떠올랐다”며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바로 그 때문에 목소리를 잃어버리네, 나와 똑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목소리, 즉 자신의 주장과 정치적 견해를 희생했다는 은유다.


인터뷰 중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I didn't want to be alive any more)”라는 말까지 한다. (견디기 힘든 우울감이 있으면 1330에 전화하세요. 생명은 소중합니다.)


참고로, 인용문 출처는 ‘더 선(The Sun)’의 메건 마클&오프라 윈프리 쇼 녹취록 transcription에서 따왔다. 더 선은 마클과 악연 투성이인 타블로이드지이지만, 녹취록은 완벽.

https://www.thesun.co.uk/news/14277841/meghan-markle-oprah-interview-full-transcript/


그의 인터뷰를 보고, 또 관련 기사를 쓰고 그 기사에 독자들이 뜨겁게 반응하는 것을 보며 나는 넷플릭스의 ‘더 크라운’을 떠올렸다. 독자들의 반응은 대개 마클=희생자, 영국 왕실=나쁜 놈으로 귀결됐다.


글쎄, 인생이 그리 간단할까.




‘더 크라운’에 대해선 이미 지난해 12월에, 다이애너비와 찰스 왕세자의 불륜 연인 카밀라에 대해 집중해 쓴 적이 있다. 그러나 ‘더 크라운’의 주인공은 다이애너비가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는 픽션이다. 픽션은 픽션일 뿐. 한국의 근현대사 중 많은 부분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과하게 극화(overdramatize)되면서 현실 정치가 혼란스럽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크라운’은 좋은 참고 자료다. 영국 왕실이 대체 왜 그러는지, 나름의 균형 잡힌 시선을 선사하기 때문.



'더 크라운' 시즌4 캡처. 영어 자막 켜놓고 보면 영어 공부 교재로도 훌륭하다. '모르는 척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오죽하면. [넷플릭스 캡처]


'더 크라운'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부터 윈스턴 처칠 및 마거릿 대처로 대표되는 일련의 총리들과의 인연, 그의 사랑과 상처를 그린다. 이 시리즈가 탄생 자체가 2006년 ‘더 퀸(The Queen)’이라는 영화에 닿아있다. 다이애너비의 죽음에 대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왜 세간에서 보기엔 차가운 반응을 보였는지, 여왕의 시선에서 탐구한 작품. 헬렌 미렌의 명연기가 돋보였다.


2006 영화 '더 퀸' 포스터.




‘더 크라운’은 연기뿐 아니라 연출력과 시나리오 역시 돋보인다. 시즌 1~3도 빼어나지만, 메건 마클 논란의 맥락에서 보면 시즌4는 옵션 아닌 필수.


7번째 에피소드 ‘세습 원칙’을 보면 평범한 영국인들, 특히나 외교적이고도 PC한 표현으로는 less privileged 특권을 덜 누리는 이들이 왕실에 갖는 애착이 잘 드러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21번째 생일과, 영국의 불특정 장애인 요양원의 조촐한 생일 파티를 교차 편집하여 보여준다.


누가 봐도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쪽은 영국 왕실 쪽의 생파. 조촐하다 못해 허전한 파티이지만 더 행복해 보이는 쪽은 요양원이다. 그런데 이 요양원 가족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존재가 있으니, 텔레비전에 나오는 영국 왕실 뉴스다. 엘리자베스 2세의 동생 마거릿 공주가 하루에 담배를 60개비 넘게 피우는 애연 생활 끝에 폐 수술을 받는다는 뉴스에 기도를 하고 눈물을 보인다. 이들에게 영국 왕실은 일종의 종교인 셈.


메간 마클이 던진 폭탄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또한 영국 내부에서도 왕실 폐지론이 일어나는 모양이지만, ‘더 크라운’을 보면 왕실이 폐지될 일은 없어 보임.




시즌 4의 포인트로 많은 이들은 대처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립과 화해를 꼽는다. 동갑내기 여성이라는 점 빼고는 모든 게 닮지 않은 이들은 견해를 달리하고 갈등하며 때론 협력한다. 그러나 대처가 후배 정치인들의 배신으로 다우닝 10가 총리 관저를 떠날 때, 가장 마음 아파한 존재 중 한 명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그려진다.

‘여성 대 여성으로 당신을 존경했다’는 요지의 대사도 나옴.

마거릿 대처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대비시킨 '더 크라운' 포스터. [넷플릭스]


그러나.


내 눈에 자꾸 들어온 이는 여왕의 동생 마거릿이다. 헬레나 본햄 카터의 명연기 덕에 감칠맛이 더해진 덕도 있을 것. 그러나 마거릿 공주는 그의 인생 자체가 신산(辛酸) 즉 맵고도 신 인물이다.


시즌4의 마거릿 대사 중 일부.


“사랑이라는 존재는 대개의 사람들에겐 친절하지만 내게는 날카로운 도끼와 같아.”

“행복은 변덕스러운 존재일 뿐이지.”

“사람들은 날 원치 않아. 나보다 더 예쁘고 착한 다이애너가 있는데 (스스로를 가리키며) 이걸 왜 원하겠어.”


남편을 사랑했지만 사랑받지 못했고 불륜에 음주에 마약, 애연가 등등 온갖 소문 거리는 다 만들어낸다. 마클은 자신이 영국 타블로이드의 먹잇감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랬지만, 마거릿 공주만큼은 아니지 않았을까.


헬레나 본햄 카터가 연기한 마거릿 공주 캡처 모음. [넷플릭스 캡처]


힘든 이들이 마클과 마거릿 공부뿐이랴.

갑 오브 더 갑은 엘리자베스 2세.


장차 왕위를 물려줄 아들은 공개 불륜,

남편 필립공은 젊은 시절 자신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았다고 느꼈으며,

세상은 자기를 차가운 시어머니로 낙인찍고,

또 다른 아들인 앤드루 왕자는 미국에서 미성년 성추행 혐의, etc.

집안 꼴이 말이 아닌데, 자기는 항상 위엄을 지켜야 한다.


영국 왕실의 중심축은 여왕이다. 마클이 왕실을 두고 ‘The Firm’이라는 오랜 표현을 굳이 쓴 데는 이유가 있다. 대기업처럼, 사주인 여왕의 명예를 위해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 셰익스피어가 이런 말을 괜히 남긴 게 아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감당하라.”




왕실을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더 크라운’ 역시 영국 왕실 편에 서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게 ‘더 크라운’의 미덕 중 하나.


그러나 이점은 생각해봤으면.

마클의 말을 들으면 참 안 됐고 힘들었다 싶지만, 적어도 마클은 사랑은 쟁취하지 않았나. 자기를 지켜주겠다며 왕실 타이틀과 영국에서의 생활도 버린 남자가 있지 않나. 세상의 온갖 짐을 다 짊어진 희생양인 것처럼 말하는 건 솔직히 좀 거북하다. 나는 꼰대인가 봐


왕실 일원이 막 되려는 다이애너에게 왕족 일가가 "절대로 감정을 내보여선 안 된다"고 조언 중. [넷플릭스 캡처]


영국 왕실도 물론 바뀌어야 한다. 전통은 소중하지만 시대 흐름에 부응해 혁신하며 시대와 공존하는 것 역시 왕실의 의무.


하지만 한 명의 이야기만을 듣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악인으로 몰아가는 일은 그만뒀으면 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진실은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대개는 단순하지도 않다(Truth is never pure and rarely simple).”


잊지 말자. 이번 마클 폭로 논란의 승자는 둘 뿐이다.

CBS 방송국으로부터 100억 원이라는 돈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 그리고 그 갑절의 광고료를 챙긴 CBS.


그 외엔 모두가 상처뿐.


By SJ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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