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발레 없이 못 살지만 10대 초반까지만 해도 발레에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우선, 여성 캐릭터들이 별로였다. 세상사 알고 보면 다 그렇지만,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게 발레다. 그러나 발레를 잘 몰랐던 당시의 ‘제인 에어’ 키즈였던 내게, 발레 대표작 둘은 이런 느낌이었다.
‘지젤’=
결혼 사기를 당한 청순가련 여성이 죽어서도 남자를 지켜주는 처녀귀신 스토리. 죽어 마땅한 남주 이 나쁜 놈.
‘백조의 호수’=
청순가련 선(善)녀가, 매력적인 악녀에게 남자를 빼앗기는 스토리. 왕자는 그냥, 바보 천치.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도 몰라보는 멍청이.
극강의 아름다움. [페이스북 발레 팬페이지]
세월은 흘러 흘러 이제 발레를 배운 지 어찌어찌 10년. 근육과 호흡이 빚어내는 극강의 예술을 감상할 능력이 예전보단 길러진 지금은 두 작품 모두 애정한다. 안무와 음악의 조화, 무용수들의 테크닉과 연기 등등 때문에. 그럼에도, 볼 때마다 캐릭터 때문에 못내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허난설헌-수월경화' in 국립극장 by SJ
그런 내게 대한민국의 자랑인 국립발레단이 지난 수년간 내놓은 창작극들은 가뭄에 단비 같이 고마운 존재다. 존재감 강한 여성 캐릭터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2021년 5월 22~23일)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렸던 ‘허난설헌-수월경화’(이하 ‘수월경화’)가 대표적.
이렇게 예쁜 부채 굿즈라니♡ 파리에서도 교토에서도 좋아할 듯! By SJ in 연희동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야심작인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가 발굴한 스타, 강효형 씨가 안무했다. 발레단의 솔리스트이면서 안무까지 발군인 실력파다. 강효형 씨의 ‘호이 랑’은 남장 여성군인을 그린 대작이다. 여주인공=나약한 희생양, 이라는 등식을 버리고도 근사한 걸작을 만들어내고, 계속 무대에 올리고 있는 강효형 무용가와, 국립발레단에 박수를 보낸다.
‘수월경화’는 허난설헌의 이야기를 극화했다. ‘홍길동 전’을 쓴 허균의 누이이자, 그 자신이 천재 시인이었던 그 허난설헌 얘기다. 제목 수월(水月)경화(鏡花)는 ‘물에 비친 달과 거울에 비친 꽃’을 의미한다. 볼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것을 뜻한다고.
공연 브로슈어 중 일부. 브로슈어 퀄리티도 베리굿. by SJ
1시간 남짓의 공연인데, 나는 확신한다. 무용수들에겐 적어도 2시간 같은 공연일 거라고. 그만큼 밀도 있고 촘촘하다. 허난설헌을 중심으로 하지만 모든 무용수가 주인공 같은 존재감을 갖는다. 백드롭을 창의적으로 사용한 무대장치도 돋보이고, 고(故) 황병기 선생님의 가야금 곡조 역시 귀에 착, 감긴다. 나날이 발전하는 국립발레단만의 굿즈도 인상적. 이번은 공연 테마에 딱 맞는 부채 & 시대흐름에 딱 맞춘 손소독제.
무엇보다, 국립발레단의 솔리스트이기도 한 강효형 안무가가 직조해낸 움직임은 요즘 유행한다는 말로, 월클이다. 세계적 수준. 차별에 꺾이고 애정 없는 남편에게 꺾인 허난설헌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까. 강 안무가는 손과 다리의 관절을 최대로 꺾거나, 무용수의 거칠고 때론 애절한 숨소리를 그대로 노출하는 무대를 그려낸다. 본인이 춤을 알고, 추기에 만들어낼 수 있는 동작이다.
내가 넘 좋아하는 장면. 주역 무용수가 군무에 예를 갖춘다♡ by SJ
이렇게 잘난 척하며 쓰고 있지만, 사실 공연 리뷰라는 것은 상당한 전문성을 요한다. 때가 되면 무용 비평도 따로 유럽 어드메에서 공부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때가 아니므로, 어설픈 비평은 더 하지 않기로 한다.
단,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국립발레단의 ‘허난설헌 - 수월경화’의 주인공은 무용수와 스탭 전원이라는 것.
인스타그램에 강효형 씨가 공연 후 올린 글이 있기에 그대로 옮긴다. 다행히 개인적 감상이 과히 틀리진 않은 듯.
"<허난설헌 – 수월경화>를 안무할 당시 군무 한사람 한사람 솔리스트처럼 빛나고 부각이 될 수 있는 안무를 하자라고 마음 먹었었다. 시간은 한 시간이지만 군무든 그룹댄스든 각자 고유의 무브먼트를 하고 있는 만큼, 밀도는 2배나 높다. (중략) 작업의 양이 2배나 많아지면서 몸이 한 개인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지치지만 무대 위에서 한사람 한사람 빛이 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결국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다.(하략)"
역시 강효형 솔리스트가 안무한 국립발레단의 ‘호이랑’ 역시, 기회가 되면 꼭 보시길 추천한다. 창작극은 매년 볼 때마다 조금씩 진화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될성부른 떡잎이 점점 열매를 맺어가는 모습을 보는 뿌듯함. 한국만의 색과 결을 담아낸 창작 작품이기에 더 애착이 가는 것일 수도.
사실, 강인한 여성 캐릭터는 세계적 추세다. 영국의 국립발레단 격인 로열발레단(The Royal Ballet)이 6월 4일 온라인으로 공개할 예정인 신작 퍼포먼스 ‘Lyssa’는 아예 여성 무용수만 등장시킨다. 로열발레단의 공식 인스타그램이 덧붙인 설명은 이렇다.
“The film features 17 female dancers of The Royal Ballet performing (중략) Lyssa has two themes at its heart: a celebration of female power and live performance.”
이 표현이 눈에 확 들어온다. A celebration of female power. 여성의 힘을 찬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