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신문에서 우리말 신문으로 넘어온 뒤 만난 선배 A와 B. 지금도 좋아하고 자주 만나지만 그땐 그저 무서운 호랑이들이었다 존경합니다 선배.
성실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빚으면 이 사람 아닐까, 싶었던 A. 선배들의 모든 카톡에 즉답을 하는 그분은 내게도 같은 습관을 기대했다. 그분의 2진, 즉 직속 후배였던 시절은 주 52시간은커녕, 기자들이 “앉으면 마감, 서면 취재, 누우면 기획을 합니다”라는 말을 자랑이랍시고 하고 다녔던 때였다. 난 괜히 심술이 났다. 열심히는 하지만, 왜 유일한 휴일인 토요일에도 새벽에 이 분의 카톡에 즉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그땐 툴툴댔는데, 지금은 내가 90년대생 후배들에게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 소심해서 말은 못 하지만. 어디서 꼰대 냄새 안 나요?
B를 생각하면 떠오른다. 그의 이 외마디.
“야, 핸드폰이 꺼지면 네가 꺼진 거야!”
기자질의 특성상 핸드폰은 제3의 손 같은 존재다.
But, 아무리 기자라고 해도, 아니, 혹은 기자니까 더더욱, 핸드폰이 고장 or 분실 상태가 된다. 그날도 그랬다. 하필이면 마감이 한창일 때 핸드폰이 고장이 났고, 선배는 외부 취재 중이었다. 당시는 PC카톡도 아직이었던 아름다운 때. 선배는 내게 다짜고짜 위처럼 외쳤다.
지난주 금요일 밤, 핸드폰을 잃어버리고도 위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전화를 빌려 걸어봐도 아무도 받지 않는 내 전화. 내가 세상에서 꺼져버린 기분이었다.
이 말도 떠올랐다. 김봉곤 작가의 ‘시절과 기분’ 중 나오는 구절.
“내가 선명해지는 동시에 내가 사라지는 기분은 아주 근사했다.”
카톡 프로필로서의 나, 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기분. 스마트폰에서의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기분.
하필이면 토요 근무 당직이었던 터라, 바로 S사의 홍대 지점 스마트폰 코너에 나는 서있었다. 사과회사 제품은 통화 중 녹음이 바로 되지 않기에 쓰지 않는다. S사 직원들은 참 친절도 하지.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직전, “혹시라도 모르니 전화 걸어보실래요?” 라기에 그대로 했더니 아뿔싸. 습득자가 전화를 받는 게 아닌가! 할렐루야 모드.
But 인생이 항상 그렇듯 복병이 있었으니.
비밀번호와 백업이었다.
구글 계정으로 핸드폰 원격 잠금을 한 게 발목을 잡았다. 내가 나름 사용하는 모든 비밀번호를 총동원했으나 내가 지난 3년 가까이 제3의 손처럼 썼던 핸드폰은 나에게 내가 나임을 증명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포기. 구글링을 해봐도 lock my lost device 방법은 있었지만 unlock my lost device after I found it 으론 신통한 방법이 안 나왔다. 이런 말만.
If you have Google-locked your Galaxy device, it’s like your phone is dead in the water.
dead in the water란,
"물속에서 죽어있다", 가 아니라 "이미 실패한, 성공할 가망의 거의 없는 사람 또는 계획"이다.
포기.
두 번째 만난 산의 이름은 백업.
스마트폰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은 스마트하지 못한 지를 깨우쳐준다. 나는 어쩌자고 기억도 못할 비번을 걸어놓은 걸까. 어쩌자고 귀찮음을 앞세워 사진이며 영상을 백업하지 않은 것인가.
인생 미드인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가 갑자기 crash, 즉 다운된 맥북을 AS 센터에 들고 가서 하는 말. “So everyone was secretly backing up or what?” 나만 빼고 다들 몰래 백업들을 하고 있었던 거야?
언니, 제 기분이 딱 그랬어요.
'섹스 앤 더 시티' 드라마판의 첫 시작. 아직도 두근두근. [Google]
어쨌거나 저쨌거나 클라우드에 마지막으로 저장된 사진은 2019년 5월 제주 여행. 그나마 꼭 건지고 싶었던 북한 관련 출장의 김정은 직찍 사진이 있는 걸 보곤 안도했다.
"너든 사회든 나를 판단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내가 숨을 쉬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한 원하는 뭐든 입을 거고 OO도 할거야"라고 외치는 멋진 사만다 언니 [Google 팬아트]
사람이란 참 간사하지. 2019년부터 2021년 7월 초까지의 내 사진과 영상, 기록은 다 날아갔는데 이런 기분이 든다.
Breathe and reboot.
캐리 언니가 하는 말.
“After all, computers crash. People die. Relationships fall apart. The best we can do is breathe and reboot.”
“결국 컴퓨터는 망가지고. 사람들은 죽고. 사랑은 깨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시 심호흡을 하고, 재부팅을 하는 거지.”
나는 묻고 싶다.
사랑도 백업이 되나요.
인생은 백업이 안 되나요.
나도
백업해주면 안 될까요.
사족
이번 브런치는 꼭 52번째입니다. 1년은 52개의 주로 구성돼 있으니, (물론 그 사이 땡땡이친 주도 많습니다만) 어쨌든 1년 이상 브런치를 써온 셈이네요. 앞으로 몇 주간은 써오던 책에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그간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북한 여성 엘리트에 대해 영어로 쓰고 있는 책입니다. 제가 능력이 일천하다 보니, 책 하나에만 집중해도 겨우 끝낼 수 있을까 말까 하네요.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도 여러분도 안녕하길 진심,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