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때문에 발레를 미워할 순 없지만.

브런치 시즌2 by SJ 65번째 - 발레는 인생(번외)

by Sujiney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19년 4월, 북ㆍ러 정상회담의 마지막에 부장에게 했던 작은 거짓말.

김정은을 태운 일명 ‘1호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떠난 직후였다.

쉽지 않은 출장이었다. 서슬 퍼런 감시의 눈을 피해 북한 노동자들이 조선어 노래를 틀어놓고 일을 하는 건설 현장을 기어올라갔고, ‘금강산 식당’의 냉면 영상 몰래카메라 촬영 미션도, 어찌어찌 완수했다. 심적으로 힘든 건, 마감 재촉 전화를 받은 곳이 극동연방대 캠퍼스, 뽀뽀하는 커플 사이였단 것. 아래는 증거사진.

다소(?) 열악했던 마감 환경. 이 커플 결혼했으려나. By SJ

보람도 컸지만아쉬움도 있었다. 이번 북ㆍ러 정상회담이 한반도 정세에 미칠 지정학적 영향에 관해 공&시간을 들여 쓴 분석 기사보다, 30분 만에 쓴 김정은 위원장의 양복 뒤가 구겨졌다는 스케치 기사를 독자들은 더 많이 클릭했다.


뭐, 아무려면 어때. 내겐 다 계획이 있었으니.


“이젠 숙소 돌아가서 좀 쉬고 서울 돌아와서 후속 기사 뭐 쓸 건지 생각해라”

는 부장 말씀에 나는 공손히 “넵”이라 답한 뒤 운전을 담당해준 현지인 블라디미르에게 (통역 앱 개발자님 복 받으시길)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린스키 극장, 플리즈!”


마감 후에 보는 발레는 꿀맛♡ By SJ


블라디보스토크행 출장을 명 받았을 때부터 내 머릿속엔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취재 잘 마치고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을 보리라! 발치광이의 러시아행에서 마린스키와 볼쇼이가 없다면. 유재석 없는 '놀면 뭐하니' 아니겠나.


잠시 배경설명.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블라디보스토크를 극동 지역 개발 거점으로 삼고 있다. 개발의 상징으로 유수 대학인 극동연방대를 세웠고, 러시아 발레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마린스키 발레단의 분원 격인 극장을 세웠다.


마린스키 네 글자에 심장이 뛰지 않을 발레 팬은 지구 상에 없다. 마린스키 생각을 하며 건설 현장 철조망 등산도, “일없습네다”라는 금강산 식당 북 여성 종업원의 냉대도 웃으며 넘어갔다. 현장에 같이 있던 타사 기자들은 (관심이 없었으니) 쓰지 않은 아래 (어쩌다 단독)기사도 썼을 정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49309


마린스키 극장에선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이하 ‘잠미녀’)’를 공연 중이었다. 심봤다! 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 푸틴에게 고마웠던 건 그때가 유일하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푸틴이 무려 1시간도 넘게 지각하느라 마감에 고생을 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은 또 어떻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린스키 극장의 로비 매표소에서 “가장 좋은 자리 주세요”라고 외치던 순간은 달콤했다. 실제 공연은 꿈같았다. 가장 좋은 표였음에도 5만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도 깜놀.


만에 하나, 마린스키의 한국인 스타 무용수 김기민 님을 알현할 수 있을까 했지만, 그건 미래에 이룰 소원으로 남았다. ‘잠미녀’는 러시아에서 흥한 클래식 발레 중에서도 체력 소모가 유난히 크고, 무대 장치 면에서도 규모가 방대한 공연에 꼽힌다.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님도 지난달 인터뷰에서 “현역 때 가장 체력적으로 힘들었던 작품”으로 ‘잠미녀’를 언급했다. 관객 입장에선 그만큼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작품인 셈.

커튼콜 사진. 하트뿅뿅♡ Ny SJ


그러고 보니, 2014년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에 취재를 가서도 나는 기차를 타고 인근 소도시에서 러시아 정부가 마련한 발레 갈라 공연을 보러 갔다. 푸틴은 싫은데 발레는 좋은, 복잡한 마음은, 러시아 발레 무용수들의 이 세상 것이 아닌 완벽한 푸에테 16회전과 날렵하면서도 공기처럼 가벼운 앙트르샤 점프 앞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푸틴이 발레에 대한 애정이 순수하고 깊기에 이런 극장을 세우고 공연을 마련하지는 않았을 거다. 러시아가 세상에 자랑할만한 문화 예술 자산 중 발레가 해픈 투 비 있었기에 그걸 적극 활용했을 뿐.




나이를 먹어가면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더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100% 푸틴 잘못이다. 이의 여지 제로.

취미발레인들 사이에서도 러시아 비판의 목소리는 응당 그래야 하듯, 강하다. 그중에서도 러시아의 대표적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에 대한 의견들을 몇 번 마주쳤다. 나도 기사를 쓰긴 했지만 자하로바는 푸틴에 의해 대통령 직속 문화 관련 위원회에서 일했고 그 뒤엔 두마(Duma)라고 불리는 러시아 의회에서 의원으로 단임 임기를 마쳤다. 구글링을 하면 푸틴이 자하로바에게 직접 훈장을 달아주는 사진도 어렵지 않게 나온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자하로바가 내는 목소리는 적어도 한국까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다(as of 3월27일, 2022년). 그러다 보니 자하로바에 대해 “친 푸틴” 꼬리표가 붙고 비난의 목소리가 거센 것. 볼쇼이의 간판 스타 중 한 명이었던 올가 스미르노바가 “모든 영혼을 다해 전쟁에 반대한다”며 조국을 버리고 네덜란드 발레단으로 이적한 것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우크라이나를 위한 공연 소식. 올가 스미르노바가 출연하고 델라로 같은 유명 브랜드가 후원. Dellalo Milano Instagram


나는 궁금하다. 자하로바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현재 러시아의 분위기에선, 실제로 러시아에서 계속 살아갈 생각이라면, 반 푸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 딸이 아직 어린 자하로바에게 왜 스미르노바처럼 하지 못하느냐, 라고 비판하는 것이 왠지 께름칙한 까닭이다.


실제로 자하로바가 뼛속까지 친 푸틴 성향이라면, 글쎄, 얘기가 다르겠지. 그 성향을 택할 권리는 자하로바에게 있으나 그걸 비판할 권리도 우리에겐 있다.

하지만 만약 자하로바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자신이 택한 러시아인으로서의 삶을 위해 침묵하고 있는 거라면. 손쉽게 돌을 던질 수가 있을까.


태어나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10개 중 하나가, 2016년 일본 도쿄에 가서 자하로바와 로베르토 볼레의 ‘지젤’을 봤던 거였다. 거금은 들었으나 천상의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경험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 자하로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어려운, 어지러운 세상이다.


볼레와 자하로바의 '지젤' 2막. 천상의 아름다움이다. [NBS 공식 이미지]


일각에선 불매운동도 있는 듯하다. 그리쉬코(Grishko)부터 지댄스(Zidans)까지, 메이드 인 러시아 발레 용품 불매 움직임도 있는 모양이다.

팬데믹만 끝나면 그간 아끼고 아꼈던 휴가를 그러모아 러시아에서 시작해 프랑스를 찍고 영국으로 마무리하는 발레 여행을 계획했지만 러시아는 이제 당분간 아예 지워야 하겠지.

국가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기자 아닌 취미발레인으로 쓰는 이 글에서까지 생각하게 되다니.

이래저래, 푸틴은 나쁘다.


부디 평화가 어서 다시 찾아와 볼쇼이와 마린스키의 무용인들이 마음껏 다시 춤출 수 있는 날이 오길.

Stop the war! Прекратить войну!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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