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e to meet you, 공주님!

'그래 나 토종이다' 그 일곱 번째

by Sujiney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독자다. 잘 보이고 싶으니까 무섭다.


존경하는 명 칼럼니스트 선배는 내게 몇 년 전, 기명 칼럼 기회를 주시며 이렇게 당부했다.

“네가 쓴 글을 읽고 나면 독자들이 ‘이걸 새로 알았구나’ ‘이런 새로운 시각이 있네’라고 느낄수 있는 글을 써라.”


내가 쓰는 글이 그랬으면 좋겠다. 피와 살까지는 아니어도, 읽고 난 뒤, 시간이 아깝지 않은 글.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다. 이번 주의 브런치.


평창올림픽을 방문한 영국 앤 공주. [연합뉴스]


때는 2010년 2월. 캐나다에서 밴쿠버 올림픽이 개막을 목전에 두고 한 5성급 호텔의 컨벤션 홀에서 파티가 열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관계자들을 위한 파티였다. 당연히 비공개. 특별한 티켓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파티에 어찌어찌 들어간 나를 가장 잘 표현한 영어단어는 이거다. ‘Wallflower.’ 말 그대로 벽에 붙어 있는 꽃. 의역하자면 ‘떠들썩한 파티에서 대화 상대가 없어 혼술이나 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 정도 되겠다. 무도회에서 파트너가 없어서 한껏 차려 입었는데도 벽에 붙어 서있어야만 하는 여성을 불렀던 게 어원이란다.


다시 밴쿠버 럭셔리 호텔로 돌아가자. 막 밴쿠버에 도착한 내 앞엔 비행기에서 활자와 사진으로 보았던 왕자님과 공주님, 회장님들이 한 손엔 샴페인을 들고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으로 찌든 나에 비해 그들은 여유와 기품이 넘쳤다. 무엇보다, 그들은 IOC 위원들로서 강원도 평창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었다. 돔페리뇽 샴페인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가 아니다. 취재를 해야지. ‘단독’까진 못해도 밥값은 해야지. (갑자기 웬 ‘단독 타령’인가 싶은 - 매우 타당한 - 의문을 갖는 분들은 브런치 지난 회를 참고해주시길.)


사람이 없으면 기사 못 쓴다. AI가 날씨 기사는 잘 써도 윤석열 검찰 총장의 다음 행보를 전망하는 분석 기사는 못 쓰는 이유가 뭔가. 사람이다. 취재원이다. 그 사람의 한 마디, 표정 하나를 얻기 위해 업계 용어로 ‘뻗치기’를 하고 ‘귀 대기’를 해서 쓰는 기사가 진짜 기사다.


그날 밴쿠버에서 내가 ‘뻗치기’를 하고 ‘귀 대기’를 해야 하는 대상들은 왕자님 공주님 회장님들이었다. 솔직히, 쫄았다. 그래도 안 쫀 척 (기자 일의 상당 부분이 이 ‘안 쫀 척’에 달려 있다)하고, 정석대로 갔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딸, 앤 공주(이면서 IOC 위원)에게.


“Hello, Your Excellency. I am Su-jin, a news reporter from South Korea.”

이렇게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공주 전하, 저는 한국에서 온 전수진 기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명함도 내밀었다. 입에는 한껏 미소를 머금고. 화장실에서 나름 연습 많이 했는데, 그래도 좀 비굴해 보였을 것 같긴 하다. 앤 공주는 내게 입꼬리만 살짝 들어보이더니,


Have a great evening.”

네 마디를 하곤 총총. 명함을 건네려던 내 손은 갈 곳을 잃었다. 창피함을 넘어 화가 치밀었다. 아니 자기가 공주면 다야? 명함도 안 받다니 너무 한 거 아냐? 열 받네.


당시 밴쿠버에서 찍었던 사진. IOC 위원, 그리고 관계자와 함께 했다. By SJ


열 받는 감정이 기사를 써주진 않는다. 소설가 김훈이 명 에세이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적었듯 “모든 밥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있다.” 밥을 먹으려면 꾸역꾸역 싫은 일도 해야 하는 게 밥벌이다. 공주님이 나를 무시했다고? 그게 어때서. 까짓 거, 시지포스가 돼도 좋아. 계속 돌을 굴려보자. 그 돌이 결국 계속 굴러 떨어진다고 해도.


이후 약 3명에게 더 접근을 시도했지만 꽝. 희망이 절망으로 탈색했을 즈음, 역시 죽으란 법은 없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저 멀리, 나의 명함은 받지도 않던 IOC 위원들이 한 미국인 여성에겐 볼 뽀뽀까지 해가면서 살갑게 인사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 언니, 꽤나 착해 보인다. 촉이 온다. 이 언니를 공략하자.


공략엔 전략이 필수. 먼저 지켜봤다. Wallflower가 되어서. 그 언니는 이미 IOC 위원들 대부분과 아는 사이였다. 모두가 “Hey Julie, long time no see! How are things?”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영어로 따지면 반말로 친근하게 “야, 줄리(일단 가명이다), 완전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라고 한 셈이다.


기회는 온다. 그 언니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그 옆으로 갔다. 와인과 올리브를 좋아하는 취향은 파악 끝. 줄리 언니가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올리브 접시로 향하던 때 나도 같이 올리브를 향해 돌진하며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Hello, I am Su-jin. I guess you must be Julie, right?”

(의역: 안녕하세요 저는 수진이라고 해요. 당신 이름은 줄리인 거 같은 데 맞아요?)


여기에서 중요한 거, 무조건 웃어라. 웃는 얼굴엔 장사 없다는 거, 동서고금 막론하고 진리다. 줄리처럼 착한 언니에겐 더더욱 통했다.


줄리 왈, “Yeah, I am! Where are you from? Japan?”

(의역: 맞아요 내가 줄리에요. 어디에서 왔어요? 일본?)


애국심 충천해서 발끈하면 하수 오브 더 하수. IOC 취재력은 국력에 비례하는데, 일본 기자들은 특히나 인해전술로 유명하다. 일본이 IOC 표결에서 당장 이해관계가 없다고 해도, 일단 지구 어디로든 IOC 위원들이 모이면 담당 기자들을 보낸다. 한국은? IOC 출입기자가 아예 없었다. 민망하지만, 내가 최초라면 최초랄까. 그러니 줄리로서는 '아시아인 기자=일본인'의 등식을 갖고 있을 수밖에.


그래서 나의 답.

“Well, no. I am actually from Korea. But not North Korea, you know. I was born and raised in Seoul, the South Korean capital.”

(음, 아뇨. 저는 사실 코리아에서 왔어요. 북한 말고요. 한국 수도 서울에서 나고 자랐답니다.)


인정하자. 코리아에 지구 사람들은 우리처럼 뜨거운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아직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코리안’이라고 하면 ‘북? 남?’이라는 질문을 받기 마련. 하지만 이조차 잘 활용하면 icebreaking(대화의 물꼬 트기) 용으로 활용할 수 있다.


올림픽 승마선수로 출전한 요르단의 하야 빈 알 후세인 공주. 뒤로 올림픽의 상징, 오륜기가 보인다. [캐나다 방송 CBC 캡처]


알고 보니, 줄리는 IOC 관계 일을 하다가 여러 사정이 있어 그만두고, 당시엔 IOC 전문지를 만들어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내겐 메시아와 같았다. IOC 위원들과 인맥도 두텁고, 까칠한 IOC 당국자들과도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인데다가, 어쨌든 같은 기자이기도 하다. 매달렸다. 도와달라고. 나 솔직히 IOC 취재 처음인데, 이런 사람들 처음 봤다고. 왜 명함도 안 받냐고.


줄리 언니, 씩 웃더니 한 마디 한다.


“You know, these people have certain rules.”


IOC 사람들은 나름의 규칙이 있다는 것. 규칙의 구체적 내용은 아직까진 영업 비밀이고(책도 쓸 수 있다ㅋ), 어쨌든 줄리 언니 덕에 나는 약 20분 후, 명함을 IOC 위원들에게 건넬 수 있었다. 그 중엔 아랍의 왕자도 있었고, 미국의 유명 은퇴 메달리스트, 싱가포르의 유명 기업 회장도 있었다. 그리고 오매불망 바라던 ‘단독 기사’도 쓸 수 있었다. IOC 위원들이 전하는 평창의 유치 가능성에 관한 거였다. 한국 기자가 IOC 위원들을 직접 만나 썼던 건 그 기사가 처음.


평창 유치의 핵심 인물이었던 나승연 유치위원회 대변인이 나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있다. “IOC위원들에겐 나름의 문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 문법을 알아야 말이 통하는 법이고, 그 방법은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보검이었다. 관련 기사는 아래 링크 참조.


https://news.joins.com/article/5756638


이번 브런치 글의 결론. 포기하지 말 것. 공기를 읽고 행동할 것. 도움을 청할 때는 모든 가드를 내려놓고 솔직해질 것.


이번 주는 여기까지. 하나라도 새로운 게 있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번 주는 이만 총총. 다음주엔 보다 구체적인 IOC 위원 인터뷰 성사 노하우를 갖고 돌아오겠다.


다시 만나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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