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왕자를 만나다

‘그래 나 토종이다’ 그 여덟 번째

by Sujiney

왕자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일단 백마는 옵션 아닌 필수. 훈남 외모는 말해 뭐해. 목소리도 이왕이면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 같은 매력 저음이길.


이 모든 건 물론, 환상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취재하며 절감했다. 왕자님도, 공주님도, 회장님도, 대통령도, 모두 다, 인간이다. 그래서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영화 '백설공주'에서 허당 왕자님으로 나온 배우 아미 해머. [영화 공식 홍보 사진]


쿠웨이트 왕실의 실세라는 아랍 왕자님도 그랬다. 이름은 – 좀 길다 – 셰이크 아흐마드 알파하드 알 사바. ‘알 사바 왕자’로 통했다. IOC 중 젊은 피에 속하는 그는 IOC의 (좋게 말하면) 뉴스메이커, (나쁘게 말하면) 트러블 메이커다.


트러블 메이커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줄리아 로버츠가 기자로 열연한 1994년 영화 제목이 ‘아이 러브 트러블’이다. 트러블 없는 세상만큼 매력 없는 세상은 기자에게 없다. IOC처럼, 적어도 겉으로는 모두가 고귀하고 평온하며 우아한 (그러나 속사정은 사뭇 다른) 세계에서 대놓고 트러블을 만드는 이는 귀하디 귀하다. 만나고 싶었다.


왕자와 같은 빅샷 인터뷰는 장기전이다. 차근차근 접근해야 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왕이건 거지이건 다 만나 궁금한 걸 물을 수 있다는 게 기자의 특권이다. 하지만 이 특권엔 책임도, 어려움도 따른다.


우선 알 사바 왕자의 측근 검색에 들어갔다. IOC 취재는 팔 할이 파티 취재다. 스탠딩 파티에서 “오늘 날씨 짱 좋다” 이런 시시껄렁한 얘기를 10분 이상 늘어놓다 궁금한 정보를 슬쩍 “아 그런데 말이야”라고 하면서 물어보는 것. 주로 IOC 회의가 열리는 호텔의 바 또는 로비가 주요 무대다. 최소 5성급인 데다, IOC 위원과 그 배우자가 아닌 경우라면 IOC에서 승인한 패스를 들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단 이 성역에 들어가면 어느 정도 마음의 가드를 내려놓은 IOC 위원들과 관계자들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기자 수첩을 들고 사진을 마구 찍으면서 돌아다닌다면 하수 오브 더 하수. 취재의 기본은 취재원에게 녹아드는 것이다. 우아하게 와인을 홀짝이면서 지중해 올리브에 대한 지식을 (네O버 지식인에서 검색해) 공유하며 은근슬쩍 취재를 했다.


유용한 장소는 화장실. 정보를 들으면 잊어버리기 전에, 미소를 지으며 “잠깐 손 좀 씻고 올게”라고 자리를 떴다. 화장실에 들어가 스마트폰에 메모를 했다. 화장실은 여러모로 유용한 취재 공간인데, 여성들의 경우 화장을 고치면서 다양한 얘기를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화장실 안에서 메모를 하다가,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고 밖에서 화장을 고치던 IOC 위원들끼리 평창의 삼수 도전에 대한 알짜 정보를 들었던 때도 여러 번이다.


알사바 왕자에 대한 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 캡처]


다시 아랍 왕자로 컴백. 알 사바 왕자와 끈이 닿는 한국인들은 누가 있을까. 누가 나의 귀인이 되어줄 것인가. IOC만 수십 년 취재해온 미국과 유럽 기자 친구들에게 SOS를 쳤다. 역시 와인을 홀짝이며 “근데 말이야, 알 사바 왕자, 만나려면 어떻게 해?”라고 물었다. 이때의 톤은 “이 와인 진짜 맛있다” 정도가 좋다. 더 튀어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약간의 심드렁함을 담아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취재한 한국인 측근은 2명. 알 사바 회장과 가까운 한 강소기업의 A회장과 알 사바 회장이 동아시아 지역에 올 때마다 찾는다는 한국인 사진작가 B였다. 마침 나도 안면을 트고 반갑게 인사하던 사이였다.


바로 작전 개시. A회장과 B작가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기다렸다. 이때 유용한 장소는 호텔 조식 레스토랑이다. IOC 취재의 꽃 중 하나가 조식 레스토랑 취재다. 나는 조식 레스토랑이 여는 6시 30분부터 가장 눈에 띄지 않는 테이블을 잡고 기다렸다. IOC 위원들과 관계자들이 한껏 차려입고 오면 같이 음식을 담는 척하면서 온갖 친한 척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구토 유발적 행동이지만, 취재에선 자존심 따위 강아지에게 줘버려야 한다. A회장과 B작가를 다행히 조식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SOS를 칠 수 있었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다. 인간사 불변의 법칙. 내 인터뷰가 그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논리를 개발했다. 마침 알 사바 위원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OCA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인 아시안게임이 인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인천 아시안게임도 부각한다는 조건으로 ‘네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약 4주 후, D데이가 결정됐다. OCA 평의회가 열리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때를 봐서” 인터뷰를 시도해본다는 조건이었다.


알 사바 회장은 평소엔 아랍의 전형적인 신사다. ‘칸두라’라고 불리는 흰 가운 스타일의 옷에 ‘구트라’라는 두건을 쓰고 끈으로 고정한 전통적 스타일로 다닌다. 하지만 밤이 되면 자신의 곱슬머리를 드러내고 가죽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절친 중 한 명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IOC 회의가 열리면 “알 사바가 여는 파티장에 가자”는 말이 자정 즈음에 흘러나오곤 했다. 통 크고 손 큰 알 사바 왕자가 와인이며 안주를 모두 제공하는 파티장이었다.


한 가지 걱정. 왕자님들은 변덕이 심하다. 인터뷰에 일단 관심은 보였다고 해도 현장에서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그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선 한 방이 필요한데, 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특이한 기념품 또는 선물이다.


고민을 하다 한국적이면서 휴대가 용이한 작은 선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골똘히 생각하다 회사 근처에서 운명처럼 ‘도장집’을 마주쳤다. 나름 사비를 털어 가장 좋다는 오동나무 원목에 ‘알 사바 IOC 위원’ 여덟 글자를 한글로 새겨달라고 했다. 여기에 알 사바 왕자에 대해 언급했던 한국어 기사의 PDF를 액자로 만들었다. 이걸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인터뷰를 성공시키겠다고 작정.


마닐라 체류는 사흘. 첫날엔 A회장과 B작가 덕에 인사를 하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는 둘째 날로 예정됐었지만 자꾸 시간이 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고 해도 화장실에 가는 시간은 있고 밥은 먹어야 한다. 이동하는 시간도 있다. 그때를 노렸고, 마침 회의가 끝나고 저녁식사 장소로 향하는 알 사바 왕자를 잡아 서서 10분간 초벌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당시 사진. A회장님이 친히 찍어줬다. From SJ


선물이 다행히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가 저녁식사 후 따로 보자고 했다. A회장과 함께 기다려 그를 30분간 인터뷰했다. 그렇게 나온 기사가 이거다. 전면으로 게재됐다.


https://news.joins.com/article/13675690


이후 그는 왕실 내 권력 다툼 등 부침을 겪었다. 그래도 IOC 내에서 그의 스타성은 여전하다. 그는 오동나무 도장을 아직 갖고 있을까. 궁금하다.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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