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도 취미리노, 발레의 길을 묻다

브런치 시즌2 by SJ (71) 발라레 인생(17) feat. ‘물리의

by Sujiney

책도 사람 같아서, 개성이 뚜렷하다. 어떤 책은 말 그대로 page turner, 지금 읽는 중인 페이지를 완독 하기도 전에 다음 페이지를 넘길 만반의 준비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술술 넘어간다고만 해서 좋은 책은 아니다. 어떤 책은 한 줄 한 줄 아껴 읽으며 그 행간의 의미도 헤아리며 곱씹어 읽는다. 최근 읽은 책 중엔 ‘물리의 쁠리에’(플로어웍스)가 그랬다.


쁠리에, 또는 플리에, 즉 plié는 발레의 가장 기본이다. 한국어 표기법조차 헷갈리는 이 용어. 동작은 이렇다. 발바닥을 바닥에 온전히 붙이고 상체는 세운채 무릎을 굽힌다. 쉬워 보인다고? 발레를 해본 적이 없는 분이라면 당연히 그리 생각하실 법하다. 이 쉬워 보이는 동작을 제대로 하기가 실은 꽤나 어렵다. 이 기본적 동작을 제대로 해야 피루엣 턴부터 점프, 앙쉐느망이 제대로 가능. 국립발레단 부설 아카데미가 정기 공연을 ‘Plié’라는 제목으로 올리고 있는 것도, 그만큼 플리에가 기본 of the 기본이라는 의미일 터.




본진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이 항상 강조하는 플리에의 세 가지 기능.

1) 점프를 위한 에너지를 무릎에 축적

2) 점프를 한 뒤 플로어에 착지할 때 충격 완화

3) 허벅지 안쪽 근육, 내전근 단련.


고백하건대, 한때 플리에는 무릎을 굽히기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의 코렉션을 현우선생님이 주셨을 때, 멘붕이 왔다.


“OO씨, 플리에가 너무 형식적이에요!”


역시나. 모든 순간 모든 동작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는 게 발레다. 무릎만 살짝 굽히고, 그다음 어려운 동작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있던 나의 모습이 선생님 눈엔 다 보였던 것.


진짜 발레의 세계로 인도해주신 은인,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께서도 항상 강조하신다. 플리에와 같은 기초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재미없고 힘든 기초를 제대로 차근차근 쌓아둬야 1년 후, 2년 후 모습이 달라집니다. 재미있는 것만 하려고 하지 마세요!”

뜨끔, again.

호아나 선생님께 지난달부터 배우고 있는 ‘에스메랄다’ 작품에서도 결국 멋을 부리지 않고 찐으로 하기 위해선 플리에와 통베 등 기본이 제일 중요함을 매번 절감하고 체감한다.


지금 내 모습은 오른쪽 두 번째ㅠ


문제는 이거다.

머리로는 이해할 것 같은데 왜 몸은 따라가지를 못하는 것. 플리에 관련 다양한 꿀팁들이 발레청년(aka 박가노바) 유튜브 등에도 있지만, 나의 플리에는 여전히 선생님의 요주의 대상이다. 그래서 더 깊게 들어가고 싶었고, 그러다 찾은 게 ‘물리의 쁠리에’였다.


배진수 저자는 자칭 영원한 공대생이다. 현재 세종대 (발레 명문)에서 전자정보통신공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다. 그런 그가 우연한 계기로 발레를 보는 것에서 하는 것으로 접하며 고민한 결과가 이 책. 저작권은 소중하므로 책 속 이미지를 옮길 수는 없지만, 뼛속까지 와닿은 문장 중 하나는 이랬다.


“쁠리에는 바닥과 내가 추는 pas de deux(2인무)다.”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올해 초 세계적 발레 콩쿠르인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에서 참가 학생들에게 지도자들이 유독 강조한 말이 있었으니, “Use the floor”였다. 바닥을 느끼고 이용해 춤을 추라는 것. 플리에는 그중의 기본인데, 이렇게나 멋진 말로 표현하다니. 나의 발과 바닥이 함께 작용 반작용하는 것이 플리에인 것.


여전히 내 플리에는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그 여정이 더 즐거워졌다. 그래서, 배진수 교수께 인터뷰를 청했다. 생업으론 밥 먹듯 하는 게 인터뷰인데, 이 브런치 플랫폼에선 처음이라 개인적으로는 큰 의미를 부여 중.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다. (워낙 보석 같은 내용이 많았지만 앞으로 이 브런치 발레 관련 글을 통해 배 교수님의 소중한 quote로 인용해 나갈 예정.)


드미 쁠리에&그랑 쁠리에. 이미지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flyingpila



Q: 발레 바(barre)를 처음 잡게 되신 계기, 알려주세요.

A: 약 4년 전, 당시 국립발레단 무용수였던 이주리 선생님께서 초보자를 위해 클래스를 열어주셨는데 저를 받아 주셨어요. 선생님의 남자 제자 1호가 됐습니다. 신청 후 남은 기간 예습이라도 해야 방해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집 근처 취미발레학원(발레슈)에 등록해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예전엔 요가나 필라테스를 배웠는데, 그때 만나 뵈었던 송호진 선생님도 유니버설발레단(UBC)에 계셨고, 운동을 하면서 방향을 발레 쪽으로 많이 이끌어 주셨어요. 그 덕에 첫 시작의 장벽은 꽤 많이 낮아진 상태였죠.


Q: 일명 ‘취미리노’ 즉 남성 취미발레인에 대해선 발레계 안팎으로 편견 또는 오해가 많은데요.

A: 진심이 통하더라고요. 언젠가 인스타에도 썼지만, 취미발레계는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인어들의 나라 같아요.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대부분 사람들은 내려오다가 숨을 못 참고 다시 올라가거나, 죽고 말죠. 하지만 일단 진심이 확인되면 따뜻하게 식구로 품어주는 사회가 취미발레계 같습니다. 진심이 확인되기 전에는 단호하고 차갑고 눈길조차 주지 않지만, 일단 진심이 확인되면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것을 나누고 믿어주는 사회 같습니다. 취미리노가 되어 발레를 배우고 싶은 진심이 있다면 편견은 이내 사라질 것이고요, 호기심에 기웃거리는 것이라면 셔터가 내려올 것입니다.


Q: 공학도로서 발레 클래스에 임하는 특별한 자세가 있을까요?

A: 로봇을 많이 생각해요. 언젠가 로봇이 발레를 하게 된다면 어떤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램을 짜야할까? 발바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지? 등등의 고민이죠. 발레 하는 로봇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은 발바닥인 것 같아요. 발레 무용수의 발바닥과 발가락은 정말 경이롭죠! 제가 클래스를 받으면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보다, 원칙을 더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원칙을 얼마나 지켰는지를 중시하는 거죠. 가령 그랑 바뜨망을 더 큰 각도로 차기 위해서 상체와 골반을 놓아주기 보다는, 각도는 형편없다고 해도 상체와 골반을 지키면서 동작하는 게 더 즐거워요.


무용수의 발에 대한 경이로움은 두말하면 정말이지, 잔소리다. 발레 클래스에서 시범을 보여주시는 선생님들의 발을 보고 “발이 아니라 손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배 교수님 역시 같은 생각을 하신 건 아닐지.


인스타에서 마주친 사진. 발을 제대로 쓰기 전과 후.


동시에 배 교수님이 들려준 아래 말, 밑줄 쳐서 어딘가에 붙여놓고 싶었다.


“가령 우리가 어떤 마을에 함께 산다고 생각해보죠. 그 마을 한가운데엔 광장이 있어요. 그 광장에 발레가 있고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창문을 뚫어 발레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거 아닐까요. 그 창문은 높이며 크기, 유리의 투명도도 제각각 다르죠. 사실 취미 발레인 모두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배 교수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기에 같은 발레를 두고도 어떤 분은 ‘진화하는 발레 클래스’(저자 정옥희)라는 책을, 어떤 분은 ‘튜튜, 욕망을 입다’(정한아) 등의 해석을 내놓으신 거죠. 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분들이 자신의 발레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Q: 플리에도 어렵지만 점프도 어렵잖아요. 물리학으로 점프를 설명해주시는 책도 써주세요.

A: 사실, 로봇 연구 논문들이 자주 다루는 주제가 점프입니다. 연구 결과는 결국, 쁠리에를 깊이 할수록 높이 뛸 수 있다는 것이죠. 또, 쁠리에를 깊게 하기 위해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는 것이 도움된다는 결과도 있어요. 살짝 전방으로 점프하는 거지요 그러나 발레 점프의 기본은 상체는 수직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발레의 점프는 가장 어려운 조건의 점프인 셈이죠. 쁠리에와 발바닥은 영원한 숙제입니다. 후속작도 여러 가지 생각 중입니다만, 과학자인 저와 발레 전공자가 하나의 발레 관련 주제를 놓고 각자의 견해를 교차로 전하는 책을 쓰고 싶어요. 정재승 (KAIST) 교수와 미학자 진중권 씨가 쓴 ‘크로스’ 처럼요. (발레학원) 릴드당스 김유경 원장님과도 의기투합한 적이 있는데, 가능하면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무용수분들, 존경합니다. 사진은 국립발레단의 '주얼스' 중 루비. Copyright: 국립발레단 KNB


Q: 발레계의 발전을 위한 여러 고민도 공감했어요. 취미발레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뭘까요.

A: 결국 필요한 것은 관심과 돈이죠. 취미발레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두 가지를 충족해주시는 셈이라고 생각해요. 발레계로 유입되는 자금 중 가장 큰 규모는 입시 준비, 즉 수험생들이 지불을 하고 다음이 공연 수익이겠죠. 하지만 이젠 취미발레인들이 발레를 배우며 지불하는 비용도 무시 못하는 비중으로 성장했어요. 무대에 올리는 순수예술은 대부분 항상 적자입니다. 대중의 관심이 결국 정부와 기업 후원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될 겁니다.


Q: 취미발레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자면요.

A: 선생님이죠. 발레는 책으로 배울 수 없어요. 항상 선생님이 계셔야 하는 취미 같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선생님께 자주 점검을 받고, 잘못된 습관이나 움직임은 없는지 보는 게 중요합니다.


Q: 책에도 쓰셨지만,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게 답이 아니라 선생님과 함께 제대로 배우는 게 답이라는 말씀이시죠.

A: 우리는 눈으로 보고 발레를 배우잖아요. 비슷한 모습을 겉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는 셈이죠. 그 겉모습을 어떤 근육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덜 가질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잘못된 근육을 무리해서 쓰게 되고 곧 잘못된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반복된 연습으로 어떤 동작이나 자세를 스스로 완성했다면, 선생님과 점검해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 중 뭔가 무리하게 근육을 끌어다 쓴 것은 없는지 점검하는 거죠. 또 한 가지, 교육을 생각하면 아쉬운 게 하나 있어요. 가르치는 일을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여기는 선생님들을 발굴하고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없다는 거죠. 선생님들끼리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고 패거리를 형성하는, 그러면서 학생들의 실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시스템이 아직도 있다는 건 아쉬운 일입니다. 선생님들이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을 때 그 피해는 온전히 학생들이 감당해야 합니다. 학생 때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영향은 평생 갈수도 있죠.


Q: 마지막으로, 배 교수님께 발레란 뭘까요?

A: 나이 50이 되어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시기에 만나게 된 취미입니다. 그래서 발레가 제 인생 후반기의 주제가 되기를 바라죠. 제게 발레란, 지금은 취미이지만 앞으론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짝사랑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그 밖의 발태기(발레 권태기) 등에 대해서도 주옥같은 답변이 있었지만, 차차 풀어놓기로 하고 일단은 보자기 안에 소중히 담아 놓았다.

결국 답은 plié , 가장 기본에 있다는 것.

그 테마만으로도 이번 브런치는 충분하니까.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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