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번째 브런치 by SJ - 토종 영어 레시피
BTS가 보우하사 한국어가 드디어 세계를 평정했다. 영어의 오랜 독재가 종언을 고하고 한국어의 시대가 도래한 것. 이젠 어쩌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모국어로 한국어를 습득한 것만으로 세계 어디에서든 입에 풀칠이 가능하다. 한국어가 영어에 이어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모국어가 다른 사람들끼리 소통을 위해 쓰는 외국어)가 된 것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뉴욕타임스며 이코노미스트를 구독했던 건 과거지사. 이젠 한국어 신문이 세계 곳곳에서 발행된다. 나는 프랑스 파리의 한국어 신문의 에디터. 푸른 눈의 기자들에게 “아니, 어떻게 한국어 신문의 기자가 되겠다면서 ‘은/는/이/가’의 뉘앙스 차이도 모르는 거지?”라며 “다시 써와”라고 호통을 친다.
맞다, 꿈.
영어신문에서 일하면서 종종 꿨다. 외국인 에디터들과 말싸움에 지고 나서 씩씩거리고 잠이 들면 어김없이.
‘제대로 혼나는 기쁨’에 대해 쓴 게 바로 지난주이지만 솔직히, 혼나기만 하면 무슨 재미. 인간은, 적어도, 나는 때로 격려도 필요하다. 나의 ‘초록 펜 선생님’이었던 에디터 토비 스미스도 나의 이런 점을 잘 알았다. 그의 초록색 첨삭으로 가득한 기사를 고치느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어깨를 두드려주며 한 말. “Everyone needs a pat on the shoulder, sometimes.” 때론 누구나 격려가 필요한 법.
그렇다고 그가 나를 긍휼히 여겨 초록색 첨삭을 줄였다는 얘긴 네버 에버 아니다. 그의 사전엔 ‘불가능’과 ‘타협’이란 두 단어가 없었고, 그는 기사의 질을 위해서라면 본인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때론 악역을 즐기나 싶었을 정도.
그런 그가 자주 했던 말. “Show. Don’t tell.”
독자들에게 말로 설명을 하려 들지 말고, 스토리 속으로 독자를 끌고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한 번은 강원도 두메산골의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외국인 수도사를 찾아가 그들이 왜 많은 곳 중에서도 한국, 그중에서도 강원도를 택했는지 인터뷰한 적이 있다. 수도사들이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촬영을 부탁했고, 기사도 무사히 넘겼다.
토비가 물었다. “이 사람들, 네가 갔을 때 무슨 옷 입고 있었어?” 사실대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이었다고 했다. 이어지는 질문. “그런데 왜 이 수도복을 입히고 사진을 찍었지?” 사진 촬영을 위해 부탁했다고 하자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기사는 낼 수 없어. 당장 다시 사진을 찍어와. 그 사람들이 생활하는 있는 그대로 모습으로.”
어쩔 수 없이 지면 계획을 뒤엎고 나는 강원도 산골로 다시 찾아갔다. 그때 그대로, 티셔츠를 입은 미국인 수도사가 환히 웃고 있는 사진을 찍었다. 그의 티셔츠엔 '부처님의 자비를'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이는 기사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양념을 제공해줬다.
토비는 내게 말했다. “있는 그대로를 독자들에게 전달해야 해. 네가 생각하는 수도사의 이미지를 설명하려고 하지 마.”
독자들의 반응도, 취재원들의 호응도, 지면의 질도 역시 더 좋았다. 유구무언.
기사는 여기에.
https://koreajoongangdaily.joins.com/2003/01/06/features/Three-of-a-kind/1907412.html?detailWord=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맨땅에 헤딩도 3년이면 할만했다. 토비의 초록색도 점차 줄었다. 나의 목표는 단 하나. 토비가 적어도 기사의 리드, 즉 첫 문단을 고치지 않는 거였다. 기사의 리드는 사실 그 기사의 전부라 해도 무방하다. 일명 ‘스트레이트(straight)’라고 부르는 팩트 기반 기사가 아니라 스토리를 전달하는 기사인 경우에도 그렇다. 소개팅도 첫인상이 중요하듯, 리드는 독자에게 주는 첫인상이므로.
소설가 김훈도 ‘칼의 노래’ 첫 문장을 여러 번 고심해서 썼다고 하지 않나. 은/는/이/가의 조사를 갖고 수십 번을 고민했다고 한다.
"버려진 섬에도 꽃은 피었다."
"버려진 섬에도 꽃이 피었다."
"버려진 섬에는 꽃이 피었다."
"버려진 섬에까지 꽃은 피었다."
글쟁이 김훈의 선택은 첫 번째.
유독 탄광 사망 사고가 많았던 어느 겨울. 나는 탄광촌 취재를 자청했다. 이미 사양산업인 탄광업,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말 그대로 ‘막장’에 매일 들어가는 이들의 삶이 궁금했다. 많은 거절에 굴하지 않고 겨우 동보 탄광이라는 곳의 베테랑 광부, 이효석 님을 섭외했다. 그를 만나러 갔던 12월 말의 아침은 폭설. 탄광촌의 눈은 하얗지 않았다. 석탄 자국 때문에 회색 빛이었다. 광부들의 땀도 까맸다. 그 광경을 토비가 말했듯 그대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썼던 아래 기사 리드.
The snow lies dull-gray in this hilltop mining town. When beads of thick sweat drop from coal miners’ faces here, when soot falls off miners’ clothes as they walk home from work, the white ground darkens. For Lee Hyo-seok, 43, a pitman in the Tongbo Coal Mine, dark colors - dead grays and pitch blacks - are a way of life.
(번역: 이곳 언덕배기 탄광촌의 눈은 회색빛이다. 광부들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떨어지고,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옷에서 재가 떨어질 때, 흰 눈이 쌓인 땅의 빛은 변한다. 동보 탄광에서 일하는 이효석(43) 광부에게 짙은 색 - 죽음의 회색과 칠흑 같은 검은색 - 은 생의 일부다.)
기사 링크는 여기. https://koreajoongangdaily.joins.com/2003/01/06/features/The-Pits/1912731.html
이 기사를 넘기고, 토비에게 전화가 왔다. 또 초록 펜 첨삭 가지러 오란 얘기일 거라 짐작했지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I don’t need my green pen for this, kiddo. Good job.”
토비에게 난생처음 받아본 칭찬이었다. 왠지 눈물이 났다. 제대로 혼나 온 기쁨, 그의 지적을 거름 삼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감사한 축복이다.
그 뒤에도 토비에겐 계속 엄청 혼났고, 칭찬은 찔끔 가끔 받았다. 그와 함께 일한 2년 뒤, 나는 그 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많이 울었다. 내 기자로서의 챕터 1이 끝났다는 의미였으니.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고 독자와 소통하는 글쓰기. 토비는 나를 기자로 빚어줬다. 글을 쓰는 지독한 어려움과 그럼에도 계속 쓰는 매력과 마력을 알려줬다. 북한 여성에 관한 책을 영어로 쓰겠다는 생각은 내게 사실 모종의 깨달음 같았는데, 토비 덕에 깨우친 영어 글쓰기의 즐거움을 놓은 지 너무 오래라는 게 컸다.
글을 쓰면서도 토비의 지적은 환청처럼 계속됐다. 문장이 왜 이리 길어? 쓸데없는 설명은 줄여. 이건 너의 의견이지 팩트가 아니잖아. 사실을 네가 원하는 대로 윤색하지 마. 한 문장에 단어 30개는 절대 넘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등등.
대충 타협하고 싶을 때,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탔던 말이 백마였는지 얼룩말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 마감은 빨리 하고 싶어서 대충 쓰고 싶을 때도 토비의 초록색 펜을 떠올렸다. 얼버무려 쓰고 싶을 때마다 그가 귀국하며 보내줬던 이메일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탈고를 한 뒤, 이젠 은퇴해서 고향 산타페에 있는 그에게 이메일로 원고를 보냈다. 아래는 그가 보내준 추천사.
Sujin Chun, a first-class writer. has brought forth great amounts of information about a dark country that is far from being open to the world. At the same time, the author shows understanding.
낯간지러우니 번역은 패스. 그가 나를 “the author”라고 불러줬다는 것만으로, 됐다.
Thank you, Toby.
From forever your kiddo.
만수무강, please!
By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