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도 능력이다”

77번째 브런치 by SJ 토종 영어 레시피

by Sujiney

명색이 영어신문 기자였지만 첫 해외여행은 만 23세, 입사 후 첫여름휴가였다. 미국인 에디터, (aka 초록 펜 무당 선생님) 토비 같은 외국인들과 한 지붕 아래 일하고 있었지만 해외에 가는 건 난생처음이란 얘기. 뻔뻔함으론 금메달도 가능한 나라고 해도, 못내 겁이 덜컥. 고민 끝에 택한 건 그룹 여행, aka 패키지 투어였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7박 9일 실속 패키지! 유럽 5개국의 정수를 맛보세요”라는 홍보 문구에 홀려 결제를 했다. 새 여권 진초록색 커버를 만지며 느꼈던 두근거림. 생생하다.


13시간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영국 런던. 자정이 가까운 때였고, 인솔 가이드는 각양각색(=말 안 듣는) 여행자(=나) 때문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어서 숙소에서 편히 쉬라는 가이드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고 거리에 나섰다. 한국의 하늘이 아닌 곳에서 보내는 첫 밤, 현지인들과 반드시 얘기를 나눠 보리라. 위풍도 당당히 나섰거늘, 문을 연 식당이나 바는 없었다. 아쉬움에 들어간 곳은 편의점. 심드렁한 알바생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여보았지만 그는 세상 귀찮은 표정.


급 소심해진 나는 결국 음료수와 과자 몇 개를 계산대에 올렸다. 지갑을 열었지만 아뿔싸, 현금이 없었다. 첫 해외 나들이에 혹시라도 소매치기를 당할까 꽁꽁 싸매 둔 현금 지갑을 캐리어에서 꺼내지 않았던 것. 다행히 하나 있던 신용카드를 들고 나는 호기롭게 물었다.


“Hi, do you receive a credit card?”


부정관사도 붙였겠다, 어떠냐 나의 이 완벽한 코리안 토종 영어가! 하지만 그 알바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You mean…Do we take credit cards? Yeah, we do.”


소사소사 맙소사.

동사 ‘receive’가 아니라 ‘take’를 써야 말이 통하는 거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신용카드 받아요?”라는 한국어를 먼저 떠올리고 번역한 결과. 받다=receive이니까ㅠ


해외 첫 영어 스피킹 경험은 그렇게 창피함으로 마무리. 갈 길이 역시나 멀다.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후회는 없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거라는 데 500원.

틀리면 어때. 일단 해보는 거다. 맞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틀려도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으면 되니까. 시도를 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지만, 성공도 없다.




이 일화가 다시 떠오른 건 최근, 미국 구글 본사의 한국인 임원, 정김경숙 디렉터를 인터뷰하면서다. 구글 본사에서, 미국인 부하직원들을 거느리고 다른 곳도 아닌 구글의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을 지휘하는 인물.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하고 이력서엔 아이비리그 학교 이름이 줄줄이 있을 법도 한데, 그는 완벽한 토종이다. 구글 본사에 간 것도, 쉰이 넘어서다.



1.png 정김경숙 디렉터 인터뷰 기사 캡처. [중앙일보]


그가 인터뷰 중 내게 들려준 말.


“조거 팬츠라고 있잖아요, 그거, 영어로 뭔지 저 최근에 알았어요. 조깅할 때 입으려고 사러 갔는데, ‘Do you have jogger pants?’라고 하는 내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처음엔 발음이 문제인 줄 알고 ‘좌거’에 ‘쟈거’ 등등 다 해봤는데 그래도 말이 안 통하더라고요. 그런데 직원이 갑자기, ‘Ah, you mean ‘joggers!’라고 하는 거죠. 완전 잘못 말하고 있던 거였어요!”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나는, 속으로 “쟈거스”라고 되뇌며 쪽팔리지 않은 척을 했을 것 같다. 재빨리 결제를 마치고 도망치듯 쇼핑몰을 나왔겠지. 하지만 그는 달랐다.


“새로운 걸 배웠으니 써 봐야지 않겠어요? 신나서 쇼핑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일부러 ‘Do you have joggers?’라고 물어보고 다녔어요. 이미 샀으니 더 사지 않아도 되는데. 점원들에게 좀 미안하긴 했죠. 그래도 그때 연습 안 하면 언제 하겠어요? 덕분에 이젠 입에 착 붙었어요.”


역시, 고수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반짝거렸다. 기자 일을 하며 만난 일가를 이룬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남들은 만족할 포인트에서 꼭 한 걸음씩 더 디뎌본다는 것. 그 한걸음이 모이고 모여 천릿길이 된 것이렸다. 정김경숙 디렉터처럼.




중요한 포인트.

그 한걸음은 누구나 디딜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디디지는 않는다. 그렇게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가는 것, 그게 능력인 이유다.

자신의 실수를 배움으로 치환하는 능력.


왜 아무나 못할까. 이 능력의 베이스는 사실, 자신감이다. 자신에 대한 믿음. 실수를 했지만, 뭐 어때, 그 실수로 나는 더 나아질 거라는 건강한 자신감 얘기다. 자신의 현실과 약점을 정직하게 파악하고, 어떻게 고치면 되는지를 파악했으니 남은 건 성장뿐이라는 단단한 믿음.

자신감이란 곧 자신을 믿는 능력이다.


물론 자신감과 자만심은 다르다. 자신감의 출발점은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 어떻게 하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나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머리에서 몸으로 옮길 수 있는 열린 마음과 의지. 그게 있어야 자신감은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그렇게 성장을 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이 갖는 게, 진정한 자신감이다. 반면 자만심은 자신에 대한 몰이해에서 출발한다. 갑자기 발레 얘기를 하게 됐지만,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발레리노,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기민은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해줬다.


“자기를 잘 사랑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죠. 나르시시즘과는 달라요. 자신감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자신감이 넘쳐서 생기는) 나르시시즘도 일종의 실패 아닐까요. 자기를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하는 거니까요. 결국 (그리스 신화 속 나르시스는 호수에 빠져) 파멸하잖아요. 자기를 잘 사랑하는 건 자기를 먼저 잘 아는 거죠.”


Bravo.


김기민 인터뷰 중 220816 한예종 107호-3.jpg 인터뷰 현장. 기민리노님의 저 완벽한 데미포인을 보라...! By SJ


사실, 취미로 발레를 배운 지 수년째. 발레에 대한 사랑은 아직 짝사랑이다. 비루한 피루엣 턴을 돌 때마다 느낀다. 이 몸이 내 몸이 맞나. 내 맘도 맘대로 안되는데 몸도 맘처럼 안 되는구나. 그럴 때마다 김현우 원장님의 이 말씀을 떠올린다.

“자신감을 가져요! 될 거라고 내가 나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가 나를 믿어 주겠어? 스스로를 믿고 계속 시도해 봐야지. 자신감도 능력이에요!”


할렐루야다.

생각해보면, 영어 공부도 그렇다. 정김경숙 디렉터의 스토리처럼.


그는 미국인 동료들에게 아예 이렇게 얘기한다고 한다. “나, 영어 더 잘하고 싶으니까 내가 혹시 틀리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알려줘. 꼭 고쳐서 더 잘하고 싶어.”


이런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라니. 그런 그가 50세에 구글 한국지사에서 본사로 넘어가는 결단을 내렸다는 게 나는 또 신기했다. 한국 지사에서도 충분히 안정된 커리어를 쌓아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미국 본토로 넘어가서 영어와 씨름하고 있는 걸까. 그것도 쉰에. 공자님은 50은 하늘의 뜻을 알고 인생의 안정을 찾아가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했거늘. 그는 안정 대신 불안정을 택했다. 왜일까 묻는 내게 그는 특유의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되물었다. 어떤 일에 100%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이 내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근데요, 지금 안 하면 언제 해요?”


기사 전문은 여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88854




그와 짜릿한 인터뷰를 마친 뒤, 나는 첫 해외여행에서의 콩글리시 토종 영어를 구사하던 나를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게 됐다. 이불킥은 여전히 하긴 하지만, 그래도 시도를 해봤으니까. 시도를 하고, 틀리고, 고쳐서 더 좋은 나를 이루는 자신이니까. 내가 나 자신을 있는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겠어.


결국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런 자신과 상황을 즐겨야, 는다. 영어뿐 아니라 발레도, 인생도.

틀릴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틀릴 일도 없지만 맞을 일도 없지.

그냥 그 자리에서 현상유지를 위해 낑낑대다 떠내려갈 뿐.


우리, 당당히 틀리자. 그리고 배우자.


PS) 한 번 더 외우자. Do you take credit cards?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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