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wikkumchi Apeuro=HeelsForward

발라레 인생(26) 88번째 브런치 by Sujiney

by Sujiney

2주 후면 난 한국에 없다. 근속휴가. 같은 회사 영어신문에서 한국어신문으로 옮겨와 강산이 한 번 바뀔 때까지 그만두지 않고 기자 일을 해서 근속휴가라는 걸 받다니, 참 독하다, 나란 인간.

하긴 이젠 웬만한 악플이며 악성 이메일로는 마음에 파란도 일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파도와 밀물 썰물이 휘몰아쳤지만.
다행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외려 반대. 이렇게 마음이 뻣뻣해진 게 생존의 방식이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

일은 재미있다. 물론 힘들다. 살아 숨 쉬는 게 어차피 힘든 일이다. 그래도 자아실현도 하면서 발레 학원비 내고 레오타드 살 돈을 벌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 100% 좋거나 100% 나쁜 일이란 세상에 없다. 이젠 나를 힘들게 하는 일터 사람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사람들도 먹고살려고 저러는 거겠지. 나도 누군가에게 저랬겠지. 아니, 더했을 수도 있겠네.

연느님 가라사대. 받아 적어야함! [MBC]


판단이 쉬운 건 편하다. 북한은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 짓고 의기도 양양하게 성조기를 들고 시위하러 나오시는 분들이나, 일본이 무조건 악하다며 불매운동을 벌이며 자신들이 세상 제일 선하고 정의롭다고 여기는 이들이나, 사실 영어 표현을 빌려오자면 같은 새떼일 뿐.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

함부로 누가 싫다고, 잘못이라고 얘기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 이런 말도 있지 않나.
Everyone is fighting a battle you know nothing about. Be kind. Always.
사람이란 누구나 네가 모르는 싸움을 겪어내고 있다. 그러니 친절해라. 언제나.


Google 캡쳐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며 취재와 기사로 밥벌이를 한다는 건 사실 아이러니다. 기사뿐 아니라 거의 모든 글쓰기의 공통점은 가치 판단이 분명히 서야 한다는 것. 모르는 건 절대 잘 쓸 수 없다. 대상을 잘 알고, 겪어보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선명하게 가진 대상에 대해 글을 쓸 때, 일필휘지는 가능하다. 물론 빨리 쓴 글이라고 다 잘 쓴 글은 네버에버 아니지만.

편하게, 주어지는 정보만으로 어떤 대상을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내린 섣부른 가치판단은 독이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두 발로 걸어 나가서 직접 파내고 발굴한 다층적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기사뿐 아니라 모든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세상의 많은 글들이 사실 재활용도 되지 않는 쓰레기에 가까운 이유.

이쯤 생각나는 또 하나의 발레 명언.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들었고,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들을 선생님들의 주옥같은 티칭s.

지금 편합니까? 그럼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아는 동작이라고 쉽게 하지 마세요. 알수록 더 어려워야 해요.
뒤꿈치 무조건 앞으로 보내세요. 어렵죠? 어려워야 해요, 그래야 늘어요.
힘들어 죽겠어요? 정상입니다.
더, 더, 더, 더, 더!

사랑하는 전 선생님들. 연주쌤 여름쌤 다영쌤 감사합니당 by Sujiney


이중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씀이 있으니, "뒤꿈치 앞으로!"다. 그게 뭐 어렵냐, 싶으시면 지금 당장 해보시길. 뒤에 위치한 몸의 일부를 앞을 향해 동작을 한다는 건 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게, 발레의 모든 기본 중 하나다.

여름 선생님의 지난해 마지막 수업 후, 구멍 난 연습 슈즈를 들고 가서, "제게 가장 필요한 말씀 적어주세요 쌤, 항상 기억하게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써주셨던 말도 "포인하시고 뒤꿈치 앞으로"였다.

프로 무용수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김현우 발레조아 원장님도, 정훈일 발레조아 선생님도, 최시몬 선생님도 모두 해주신 말씀.

러시아 등 해외 발레 마스터들이 국내에 오면 가장 빨리 배우는 한국어가 뭘까요? '뒤꿈치 앞으로'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말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보다 더 중요한 셈이죠. 그만큼 뒤꿈치 앞으로, 턴아웃은 발레의 기본 중 기본이에요.

그래, 편하게 가지 말자. 지금 힘들다고 대충 생각하거나 얼버무려 판단하지 말자.



이 맥락에서, 반성 한 토막.

나탈리아 오시포바(Natalia Osipova)라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발레리나가 있다. 테크닉은 넘사벽이지만 뭔가 정이 가지 않는다고 혼자 섣불리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역시, 일을 하는 과정에서 깨달았다. 세르게이 폴루닌이라는 걸출하지만 악동인 발레리노에 대한 기사를 쓰며 정보를 그러모으다 알게 됐다(해당 기사 링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6501). 오시포바와 폴루닌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 폴루닌이 약물 복용부터 발레단과의 불화 및 갈등으로 세상을 적으로 돌리고 있을 때, 거의 유일하게 그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존재가 오시포바였다는 것.


폴루닌은 영국 로열발레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무려 만 열아홉, 성인도 되기 전)였지만 제 발로 퇴단했다. 폴루닌은 발레단이 그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다고 비난했고, 발레단은 폴루닌이 규율을 지키지 않고 돌출 행동만 했다고 비판했다. 공연 전날 돌연 잠수를 타거나, 하지 말라는 문신을 한 건 폴루닌이었으니. 판단은 독자의 몫. 그럼에도 오시포바는 로열발레단에 "세르게이와 함께 춘다면"이란 조건을 붙여 그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영국 가디언 및 미국 뉴욕타임스 기사 종합). 폴루닌에게 무대의 감을 잊지 않게, 세상이 그를 망각하지 않도록 끌어준 존재가 오시포바였다는 것.

2016년 뉴욕타임스(NYT)엔 둘의 합동 인터뷰도 있다. 첫 문장은 이렇다.
"Natalia Osipova and Sergei Polunin are ballet’s wunder-couple."
둘이 발레계의 기적(wunder)과 같은 스타 커플이라는 것.
조심스레 짐작해 보건대, 이 인터뷰도 오시포바가 "세르게이와 함께라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하지 않았을까. (기사 원문: https://nyti.ms/2eDH31m)


그러나 둘은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도드라지는 커플이었다. NYT 기자가 아래 질문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기자=You seem to have quite different dance tastes. 춤에 대한 취향이 꽤나 다른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한 오시포바의 답.
OSIPOVA Completely! But it’s boring if you think the same way all the time.
완전 달라요! 하지만 항상 같은 것만 생각하면 지루하잖아요.

이에 대한 폴루닌의 답.
POLUNIN Natasha works very hard before the performance to be more free onstage. I am more relaxed before so that I am focused onstage. It’s more dangerous, things can go wrong, but it makes me concentrate.
나타샤(오시포바)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추기 위해 사전에 연습을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저는 무대에 더 집중하기 위해 공연 전엔 더 여유를 가져요. 물론 더 위험하죠. 공연이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는 그래야 더 집중할 수 있어요.

이들은 결국 결별한다.


Wikipedia 캡쳐


이후 폴루닌의 인스타그램 자폭("뚱뚱한 것들은 때려버려!" 등의 메시지) 스캔들은 계속되고. 오시포바는 발레리나로서는 금기인 단발을 하고, 여리여리한 감성보다는 폭발적인 점프 등의 테크닉에 집중한다. 결별 후 영국 가디언 지와 인터뷰에서, 오시포바는 여전히 폴루닌에 대한 애정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세르게이가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가 그 재능을 무시하지(undermine) 하지 않고 잘 쓰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디언지가 붙인 기사의 제목의 요지는 "완벽한 파트너를 찾는다는 건 어려운 일."

완벽한 제목이다.

한때 나는 오시포바가 발레리나로서는 조금 드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판단은 그가 겪어온 인생 여정을 모르고 내린, 섣부른 판단이었을 뿐이다. 그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르고, '지젤' 배리에이션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추며 논란과 환호를 동시에 부르고, 강렬한 점프에 더 집중한 것은 그만의 삶에 대한 투쟁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다짐한다.
입부터 열기 전에,
내 한정된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기 전에,
그럴 시간에 대신,
Dwitkkumchi apeuro.
뒤꿈치 앞으로.

오시포바 무용수, 응원합니다.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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