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을 것 같던 그날이 왔다. 마스크를 벗고 그랑 알레그로를 뛰는 그날. 영원한 것은 없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이 삶도 언젠가는 끝나는 게 세상의 이치. 이 원칙에선 팬데믹조차, 마스크 강제 착용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그런데 뭐지. 좋은데 좋지만은 않은 이 기분. 쓰지 않을 자유는 돌아왔는데, 보여지지 않을 자유는 사라졌다.
그간 호흡은 불편했을지언정 마스크 안에서 내 얼굴 근육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건 다반사를 넘어 클래스의 일상. 선생님께서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은 순서를 내주실 땐 눈만 동그래지는 게 아니라 입으로도 괴상망측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쉽게 말해, 잘 보이고 싶은 남자 앞에선 절대 짓지 않을 표정들을 마스크를 방패 삼아 마음껏 짓고 있었다. 그런 시절은 갔으니.
마스크를 써야 하는 강제 의무가 사라졌다고는 해도, 물론 쓰는 것도 자유이긴 하다. 그러나 본진 발레조아에선 마스크를 쓰지 않을 것을 조심스럽게 권장하고 있다. 왜? 4월 말에 올릴 예정인 공연 때문이다.
오디션 당일. 학원에서 마련해주신 꿀맛 귤 & 발메님이 직접 만들어 선물해주신 스커트 by Sujiney
이재용 삼성 회장에게도,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에게도, 내게도 공평하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재화, 시간. 공연을 보러 와 달라고 초청을 하는 건 그래서 무게감이 큰 일이다.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2023년 4월 29일의 시간을 들여 공연을 보러 와달라고 하는 것이니. 그 시간의 재화를 이 공연을 위해 투자해 달라는 의미. 그렇기에 무대에 서는 사람들은 항상 최선 그 이상을 다해야 한다.
뜬금 없는 사진이지만, 봄이다. By Sujiney
재미있는 건 입장이 바뀌고 보니, 큰 부담 중 하나가 표정이라는 것. 본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다.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입장, 위에서 아래를 보는 입장이 되기 때문. 물론 무대에 오르는 이들이 없으면 볼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만, 일단 무대 막이 오르고 나면 권력의 구도는 달라진다. 평론가들과 관객들에게 권력이 주어진다. 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만큼의 지성과 판단력, 인성이 있는지 여부는 별개. 함량 미달 인상 비평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함량미달인 경우가 솔직히 다수.
돌이켜보면, 발레 무용수분들의 무대에서 인상을 깊게 남기는 건 상당 부분 표정이었다. 저 무용수의 탄듀는 턴아웃이 좀 아쉽다거나, 이 무용수의 그랑주떼는 각도가 모자랐다는 식으로 공연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이들이 무대에서 뿜어내는 에너지, 무대와 조화를 이루며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객석도 함께 호흡한다. 그 중요한 매개체가 바로, 표정인 것이다.
그래서 잊지 못한다. 지난해 발레 슈프림(Ballet Supreme 2022)에서, 김기민 마린스키(Mariinksy) 발레단 수석무용수가 날아오르며 지었던 그 표정. "아, 지금 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어서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표정. 2020년 2월, 코로나로 모든 게 멈추기 직전 도쿄에 파리오페라발레단(Paris Opera Ballet)이 온다고 해서 무리해서 갔던 '오네긴' 공연에서, 위고 마르샹 에투왈(수석무용수)의 회한에 찬 표정은 또 어떤가.
미칠 듯 코어를 잡고 온 힘을 다하면서도, 표정은 이토록 밝다니. 출처 Kimin Kim Fans Instagram
수년 전 역시 도쿄에서 공연한 로베르토 볼레(Roberto Bolle) 무용수와 스베틀라나 자하로바(Svetlana Zakharova) 무용수의 '지젤(Giselle)'은 그들의 표정 연기만으로도 눈물이 주룩주룩. 그 밖에도 대한민국의 자랑, 국립발레단(the Korean National Ballet)과 유니버설발레단(the Universal Ballet)을 비롯 서발레단(the Seo Ballet) 등등, 모든 무용수들의 좋은 공연은 벅찬 표정이 필수 핵심 요소다.
이제, 백 투 더 현실. 학원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은 오마이갓.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이 "표정도 연습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시는 건 이유가 있다. 표정도 얼굴 근육이 만들어내는 거니까. 근육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표정 근육도 마찬가지.
쓰면서 깨달은 사실. 발레 무대뿐 아니라 인생의 무대에서도 표정은 중요하다. 발레학원을 가면서 마주치는 대중교통이며 길거리의 사람들을 보면, 표정들이 꽤나 무섭다. 아마 내 표정 역시 그럴 거라는 데 500원. 흥미로운 건, 그 사람들이 무서운 표정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 그저 무표정하게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의 얼굴 근육이 의지를 상실하면 꽤나 무서운, 적어도, 아름답지 않은 표정이 지어진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아마 그래서 생겨난 거 아닐까. 이왕이면 부루퉁한 표정보다, 환한 표정에 말이라도 붙이고 싶어지니까. 웃는 낯에 침 뱉기 (불가능하진 않지만 적어도) 어렵기도 하고.
발레를 하며 소중한 '처음'을 만났다. 2023년의 1월 28일 토요일은 나의 짧지 않은 인생에서 '오디션'이라는 걸 처음 해본 날. 그리고 2월 2일, 오디션 합격 통지를 받고, 솔직히 어찌나 기쁘던지. 물론 로잔 발레 콩쿠르(the Prix de Lausanne)도 아니고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 오디션도 아니지만, 그래도 내겐 소중한 처음이었다.
마스크 속에서 잠시 잊었던 진심으로 웃는 법. 다시 연습하자. 발레 공연을 위해서, 또 나의 인생 무대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