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빠르게, 셰네턴도 인생도.

발라레 인생(25) 87번째 브런치 by Sujiney

by Sujiney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는 말.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불후의 명언으로 꼽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건 이젠 고인이 되신 김영희 국제문제 대(大)기자 덕이었다. 기자로 시작해 학자이자 심지어 소설가로, 84세를 일기로 2020년 작고하시기 전까지 글을 썼던 분이다. 외교 및 국제문제의 가히 달인. 외교부와 통일부를 출입하며 김영희 대기자의 후배일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던 적, 차고 넘친다.


Festina lente를 구구절절 설명한 위키피디아. 그만큼 중요하단 얘기.


김영희 대기자가 좋아했던 표현이 바로, Festina lente. 주로 대북 정책 관련 맥락에서 한국과 미국 당국에 현안 해결에 시급성을 갖되, 서두르지 말고 면밀하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제2의 김영희'이자 '여성 김영희'를 한때 꿈꾸었던 나 역시, 그분의 흉내를 내서 아래와 같은 기사를 쓰기도 했었지.


2018년, 북한만 보고 쓰고 읽었던 때의 my 기사 일부. 중앙일보 캡처


잊고 있던 이 말을 갑자기 떠올린 건, 오늘(2023년 1월 22일), 설 당일 발레 특강에서였다. 발치광이의 명절은 발레 특강 유랑이다. 본진이 휴강을 하는 경우, 명절 특강 찾아 삼만리를 하는데, 오늘은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발레위(Ballet Oui)라는 곳으로 원정.


티머니를 써서 갔다고는 해도 처음 가는 원정인데, 아무렴 두 타임 연강은 들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종우 선생님의 셰네 턴 심화반에 이어 무려 '호두까기 인형' 중 파드되(pas de dexu, 2인무) 클래스를 들었다. 셰네 턴을 돌던 내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빨리 가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급하게 가면 안 돼요! 할 건 다 해가면서 신속 정확하게 도세요!"


발레 선생님들은 아실까. 선생님들의 주옥같은 티칭 하나하나가 인생 명언이기도 하다는 것을.


프랑스어 '셰네'는 체인이다. 동일한 굵기와 형태의 원이 연속되는 체인처럼, 를르베 업을 선 채로 한 방향을 보며 일정한 속도로 돌고 돌고 또 도는 게 셰네 턴. 돌다 보면 문제가, 마음이 급해진다는 데 있다. 음악은 가차 없이 흐르고, 내 옆과 페이스를 맞춰야 할 것 같고, 선생님의 티칭은 이어지고. 그 와중에 어깨는 내리고 갈비뼈는 잠그고 골반은 세우며 내전근을 맥시멈으로 쓰고 를르베 업도 튼튼하게 유지해야 한다. 헥헥. 할 것도 많고 지킬 것도 많은, 그래서 어렵지만 아름다운 게 발레이니까.


아름다운 저 턴아웃♡ 사진은 그리쉬코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문제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문제는, 셰네 턴뿐 아니라 거의 모든 동작에서 마음이 급해진다는 것. 마음은 급한 데 몸은 따라잡지 못하다 보니 여러 참사가 발생한다. 오늘의 셰네턴에서도 그랬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는데 꼭 다섯 번째 턴부터 동공은 지진, 내려야 하는 어깨는 솟아오르고 당겨 내려야 하는 턱은 하늘로 치솟고, 적확해야 하는 턴은 뭉개진다. 보다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선생님이 외치신 말. "빠른 건 급한 게 아니에요." 이거야말로 Festina lente, 발레 스타일.


사실, 셰네 턴뿐 아니라 발레의 모든 동작이 그렇다. 빠르게 하되 그사이 해야 할 연결 동작을 빼놓지 않고 정확하고도 예쁘게 해야 한다. 이종우 선생님은 또 "공중에 다리가 있는 모든 순간엔 다리를 늘려야 합니다"라고 했다. 파드되 클래스에선 "폴드브라를 정확하게만 하는 게 아니라, 예쁘게 해야 한다"는 말씀까지 들었다. 쉽지 않다, 발레 너란 녀석.


오늘부터 시작하는 계묘년. 이젠 적지 않은 나이라서 마음이 조급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만 가면 어그러질 것을, 이젠 안다. 그렇다고 넋 놓고만 있으면 되는 일도 없겠지.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도,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도 항상 강조하시듯, "시도조차 하지 않는 테크닉은 실패할 일이 없지만 성공할 일도 없"으니까.


그래서 오늘부터 다시 결심을 새롭게 한다. 천천히 빨리 가기로. 셰네턴도, 인생도. 그러다 보면 아름다움의 그림자라도 밟을 수 있기를.


독자 여러분의 새해 건안을 기원한다.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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