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죽음도 고통도 없으셨을 것 같다. 우리가 보기엔 더없이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던 것 아닐까? "죽음의 고통이 두렵니? 죽음 이후 또한 걱정되니? 고통과 걱정을 물리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단다. 사랑하거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거라. 사랑할 때 희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언젠가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고통과 두려움을 미리 조금씩 태워버리는 일이란다. 네가 네 이웃을 사랑한 만큼 그만큼 말이다."
하루 종일 밭일을 하시고 돌아온 어머니는 아픈 어린 나를 업고 밤새 방안을 서성거리며 토닥여 주셨다. 마치 잠을 잊은 사람처럼. 생명과 바꿀 만큼 자식을 사랑한 힘이었다고 믿는다.
그 다음날, 주일 예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니시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나를 업고 방 안을 걸어 다니셨다. 바닥에 내려놓아도 되었을 텐데, 아마도 내가 업히는 것을 원했었던가보다. 교회 결석하는 것을 죄로 알았던 어머니는 그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어버리신 것이다. 사랑 앞에서 죄인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심 아닌가.
아, 이렇게 사랑을 받은 내가 되갚을 길은 없다 생각했는데, 내 아이들이 문득 떠올랐다. 최선을 다해 사랑해 주었던가. 내 할 일이 더 중요해 보여서 학예회가 열린다고 했는데도 못 갔던 지난날이 스친다. 내 안에 사랑 부재중 경고등이 벌겋다.
자식 버릇 고친다면서 차가운 날 대문 밖으로 내쫓았다던 그 어떤 아버지는 나의 이야기가 결코 아닌 줄 알았다. 나 또한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매몰차게 두 아이를 윽박지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참 죄스럽다. 사랑하라는 한 마디를 성경 속에서만 익히고 실천에는 소홀해서다.
밀키트를 끓여 먹고 뒷정리를 하지 않고 집에 가버린 딸을 보며 짜증을 냈던 나, 양말을 또 벗어놓고 갔다며 오늘도 투덜대던 나, 그밖에 셀 수 없이 해댄 잔소리는 결코 사랑이 아니었다.
나에게 잔소리하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신기하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지점이다. 정의, 도덕, 예의라는 명목으로 훈계하는 것은 정죄함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도 일종의 정죄구나. 정죄할 자격은 사람에게 없는 거였다. 사람이 사람을 어찌 판단하랴.
내 인생의 주인공들은 나의 가족들이다. 내가 아니다. 주인공이 잘 되어야 드라마가 성공한다. 남을 해치지 않는 한 가족들에게 '너 잘되라고'식 잔소리를 잘 참아보려 한다. 아니, 잔소리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 신의 신비한 명령 '사랑하라'를 실천함으로 견고해지는 내 삶이었으면 한다. 살고 싶어지는 삶이 있다는 게 바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