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나를 지나간 자리에서

은퇴 그리고 글쓰기

by 별빛수

‘은퇴’라는 단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회한과 불안, 그리고 세월의 속도감이 담겨 있다. 직장과의 이별은 흔히 축하받는 일로 포장되지만, 정작 그 순간은 마냥 축하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자유로움이 느껴지지만, 또 한편으로는 막연한 걱정과 정체성 상실 같은 허전함이 밀려온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달려온 길에서 벗어나는 일은 ‘청춘의 종료’가 아니라, 다른 길 위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는 기회일 수 있다. 그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선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필요하다. 은퇴는 역할이 바뀌는 시간일 뿐, 인생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나의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일 수 있다.

그동안은 쉼터가 있어도 앉을 수 없었다면, 이제는 잠시 걸터앉아 바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젊을 때부터 갈고닦아온 현장의 경험, 수십 년간 쌓아온 관계, 수많은 배움과 실행이 누군가에게는 삶의 소중한 해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분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은퇴하고 나니 처음엔 허전했는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깨달았어요. 그저 지나온 시간이 아니라, 정말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이더라고요.”


누구나 자신만의 평범한듯 하면서도 독특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것은 단지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또 누군가에게도 맑은 물 한 모금 같은 파워 메시지가 된다.


은퇴는 종착점이 아닌 것이다. 새로운 출발선이며, 이제는 누군가를 위한 생존의 삶이 아니라 비로소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귀중한 찬스다. 그 시작을 글쓰기로 해보는 것은 어떨까.


삶을 돌아보고, 선택하고, 다듬고, 정리하는 일은 단지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을 깊이 이해하고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과정이자,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는 인생의 유산이 되기도 한다.


하루 5분도 좋다. ‘나에게 쓰는 다정한 인사’부터 시작해도 좋다.


“지금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예전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짧고 가볍게, 말하듯이 시작하면 글쓰기가 훨씬 부담 없이 이어진다. 또한 인생의 시기를 구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알아야 면장을 하는’ 학생시절, 흔들리며 피는 꽃같은 직장생활, 돌봄과 책임이라는 왕관을 쓴 가족생활, 이제서야 할 수 있게 된 나의 발견들이 될 은퇴생활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만 간직하는 글’이 아닌 ‘누군가에게 닿을 이야기’를 염두에 두며 써보자.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내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어떤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내 글을 읽게 될 독자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순간, 그 이야기는 훨씬 따뜻하고 진심 어린 울림을 담게 된다. 마치 누군가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듯,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감사와 연결은 피어난다. 시간은 우리를 지나쳐갔지만, 우리는 그 시간을 글로 붙잡으며 두 번째 삶은 좀더 그럴싸하게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


나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삶을 마주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시간이 나를 지나간 자리에 서보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맞이할 마음을 갖추는 정갈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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