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고 싶었던, 되지 못했던, 되지 않을 것

(8) 청담동 by 강신명

by 장동원

그러니까 청담동에 처음 가본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같이 모의유엔 대회를 준비하는 친구들과 함께 자료조사를 위해 청담동의 한 카페에서 모였다. 청담동이 부촌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청담동에 처음 갔을 때는 내가 살던 잠실동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부모님이 명품을 두르고 다니시는 분이 아니라 휘어진 압구정로를 따라 즐비한 명품 샵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고 고등학교 1학년의 눈으로 봤을 때 한강변에 자리잡은 현대아파트니 한양아파트니 하는 것들은 잠실 주공아파트와 매한가지로 낡은 아파트처럼 보였다.

대회가 끝난 후에는 근처에 살던 여자친구를 만날 일이 아니고서 청담동에 갈 일이 잘 없었다. 기숙사에 살던 내게 세상은 그저 친구들이 즐비한 학교와 부모님이 계시는 집이 전부였고, 옷이라고는 편해서 입던 세 팩에 만원 하는 흰 티셔츠와 푸른 넥타이의 교복이 전부였다.

그렇게 내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청담동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 것은 교복을 벗은 후의 일이다. 모두가 똑같이 교복을 입고 똑 같은 것을 먹고 똑 같은 공부를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게 중 일부는 내가 압구정로에서 본 명품 브랜드의 옷을 입고 청담동 클럽에서 하룻밤 사이에 수십만원을 쓰기도 했다.

나는 입시 결과가 얼추 정리된 2018년 1월, 나쁘지 않은 입시 성적표로 과외를 시작했고, 유학생 과외시장이 좁은 덕에 청담동에서 좋은 페이를 받는 과외를 구할 수 있었다. 어느 외국인학교에 다니는 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과외였는데, 대부분의 수업은 청담중학교 옆에 위치한 학생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처음 수업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붙어있는 대문이 차갑고 무거웠던 것, 유난스러운 성격이 돌이켜 보면 영화 <기생충>의 조여정 배우를 연상시키는 어머님, 더럽게 말 안 듣던 학생과,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하는 자괴감까지. 세시간의 기 빨리는 수업 끝에 나는 그 무거운 철문을 열고 겨울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문에 내가 가평 기숙사에 들어가 있던 주에는 가평에서 서울 오는 택시비를 내 가면서까지 수업을 부탁할 정도로 자식 교육, 또는 부를 대물림하는 일에 열성이셨던 학생 어머님 덕에 수업이 여러 번 잡혔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지만 내 힘으로 돈을 벌 생각에 마냥 기뻤다. 그렇게 몇 달 동안 청담동에 매여 살았다.

처음 받은 과외비로는 나의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리고 싶었다. 당신의 인내와 투자에 대한 답례를 꼭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나를 키우느라 명품 백 한번 들어보지 못하셨다는 어머니께는 가방을, 몇 년째 헤진 양복을 입으신 아버지께는 정장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렇게 과외비를 정산 받는 날, 내 계좌에 찍힌 일곱자리 숫자를 보고 기쁜 마음으로 압구정의 갤러리아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B 정장 매장과 P 명품 가방 매장 직원에게 내 예산 범위를 말하자 그 가격대의 제품은 없다는 답을 들었다. 겨우 한 달 월급으로는 택도 없던 것이다. 그동안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살던 내가 청담동에서 처음으로 돈의 부조리함을 경험한 2월의 겨울바람은 차가웠고, 허망한 마음만 가득했다. 내가 청담동에서 살았더라면 저 매장들에서 물건들을 사고 고액 과외를 받으며 더 좋은 대학교에 합격할 수도 있었겠다는 모종의 질투심과, 내가 자라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꼭 내 아이를 청담동에서 자라게 하겠다는 이상한 목표의식이 생겼다.

그렇게 몇 달을 허무주의에 빠져 스물을 보내다가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에서는 내가 청담동의 삶을 부러워하듯이 나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내가 부러워하던 청담동의 삶이 우스울 만큼 유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일상에 쫓겨 책 한권 읽을 시간조차 없이 생각이 말라가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삶을 보며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반면 나보다 월등하게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많은 돈을 쓰고 다녔는데, 생각이 썩어버릴 정도로 가볍고 사치스러운 그들의 삶이 부럽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청담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내가 안타까워 했던 모든 것이 과분할 정도의 행운처럼 느껴졌다. 청담동은 그저 내가 아닌 무언가였다. 내가 얼마나 청담동의 일부가 되고 싶었는지와는 무관하게 나는 청담동의 일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안동이었고, 잠실이었고, 청심이었다.

내가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 나는 내가 경험할 수 있었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나는 청담동이 아니기에 이젠 청담동의 일부가 되고 싶지도,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잠실에서 자라고 청심에서 공부하며 할 수 있었던 생각과 쓸 수 있었던 글들, 나눌 수 있었던 대화들을 나보다 곤궁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