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과 진실
“잘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장과 면접용 블라우스를 맞춰 입고, 세상에서 가장 착한 눈빛을 발사하던 오양이 있었다. 한 5년쯤 전에 말이다. 나인 듯 나 아닌, 하지만 나에 가깝기는 한 서류를 아주아주 열심히 써서 한 열 번은 고쳐 읽은 다음 기도와 함께 여러 곳으로 보냈다. (새우깡에 새우가 8.2%가 들었다고 한다. 자소서에 그보다는 많이 내 이야기가 들어갔으니 ‘오양 자소서’라고 불러도 될 것 같기는 하다.) 다헹히 새우깡처럼 뻥튀기된 자소서에 매료된 한 회사가 오양을 불러주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할 수 있다는 건 거의 거짓말이었고,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는 나름 진실이었다. 그때까지는.
오양은 그렇게 자기 ‘밥벌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한 달 치 일을 안 했는데도 미리 들어온 월급에 감복하여, 회사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딱 일한 날짜만큼만 돈을 주던 아르바이트와 달리 날 믿어주는 것 같아서. 입사 초기, 업무는 당연히 학교에서 배운 것과 딴판이었고 처음으로 맺어가는 다양한 인간관계도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오양은 꽤 적응력이 좋은 편이다. 눈치 코치 살려, 돈 쓰는 세상을 벗어나 돈 주는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업무는 무조건 완벽하게 해내야 하는 줄 알던 0.7년 차 오양은 조사하고 묻고 또 뒤졌다.
3년 차 오양은 ‘완벽’이라는 건 매뉴얼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은 아무도 ‘완벽하게’ 아는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양은 페이퍼워크 따위는 적당히 해내는 ‘직장생활 스킬 1’을 마스터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사람과의 관계도 참 어려웠다. 여태껏 비슷한 나이 또래 혹은 친구와의 어울림이 인간 관계의 전부였다. 여기서는 부모뻘인 사람과도 어려운 사람과도 종일 같이 붙어있어야 했다. 내 부모와는 반년에 한 번씩 보는데 동료와 매일 같이 밥을 먹자니 때때로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그들과 나누는 대화는 중요한 이야기와 쓸데없는 이야기가 3:7 비율쯤 되는 것 같았다. 3만큼 배울 점도 있었지만, 끝도 없는 7만큼의 개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자면 종종 현기증이 났다. 오양은 눈으로는 상대를 바라보며 동시에 딴 생각을 해내는, ‘직장생활 스킬 2’를 익혔다. 스킬 2는 의외로 스킬 1보다도 더 중요했다.
워라밸. 요즘 많이들 쓰는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에 도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 무급 야근을 자처했다. 퇴근 후에 걸려오는 모르는 번호에는 매번 심장이 철렁했다. 직장인 오양과 자연인 오양을 처음부터 칼같이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얽히고 꼬여 한 몸이 되기 전에 적당히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선방이었다. ‘스트레스 받아야 내 손해다’를 되새기며 직장인 오양과 자연인 오양을 가까스로 떼 내었다. 이것이 가장 어려웠던 ‘직장생활 스킬 3’이었다.
가까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간 익혀온 스킬1~3 따위를 곱씹어보는 찰나, 월급 주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어쩐지 이 아저씨 앞에 서자면 어렵게 익혀온 스킬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오대리, 그때 그 기획 왜 아직도 결과 보고 안 해?”
“아... 네...! 지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젠데 아직도 결재를 안 올렸어?”
“아... 넵... 그게... 아... 오늘 퇴근 전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렇다. 오양이 아무리 내면의 스킬을 갈고 닦아봤자 밥벌이의 실체는 꽤나 복잡한 것이었다. 월급을 얻기 위해는 생각보다 해야 할 일도 신경써야 할 것도 많다. (딱 먹고 살 만큼만 주면서!)
대단히 회사 생활에 통달한 척하는 오양은,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할 때면 서러운 마음이 올라오기 때문에, 괜히 센 척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아직도 상사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손톱의 거스러미를 뜯게 되고, 불시에 걸려오는 클레임 전화에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단계에 불과했다.
타지에서 자취생활을 하는 오양은 ‘점심 한 끼’가 꽤 중요한 영양분 섭취원이다. 원래도 밥을 느리게 먹는 편이었던 오양은 아직도 회사 점심 시간이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다.
“오 대리는 밥을 하루종일 먹는거야? 우리 먼저 일어날게. 껄껄껄”
그래도 밥 먹는 속도가 맞는 동료가 한 명은 있어 다행이다. 후식 선발대가 길을 나서면 유일한 밥 동지와 진짜 식사가 시작된다. 같은 자취생 처지의 ‘이양’이 있어 다행이다.
직장인이라면 밥은 굶어도 커피는 굶지 않는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오늘도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샀다. 까만 생명수를 쪽쪽 빨며 악의 구렁텅이로 되돌아가는 오양과 이양의 발걸음이 무겁다.
‘아니? 다섯 시간이라니! 아직도 다섯 시간 남았다니!’
자리에 앉아 더부룩한 속과 괴로운 눈꺼풀을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다시 한번 달래본다.
‘더 큰 사이즈로 살 걸......’
괜히 다 마신 커피 컵을 쭉쭉 빨아 보지만 이젠 커피라기보단 보리차 맛에 가깝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돈 주는 사람이 지적한 이상, 오늘은 반드시 결과 보고서를 올리고 퇴근해야 한다. 의외로 집중해서 일하다 보니, 오후 다섯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회사 일을 좀 깨달은 척하지만, 아직도 한참 모르는 오양. 오늘도 이렇게 얼렁뚱땅 9시간을 회사에서 불태웠다. 아름답게 표에 음영을 칠하고, 괜히 그래프도 넣은 보고서를 완성했다.
“하, 오늘 1인분은 했다.”
‘2021년도 0000 보고서 (최종)’을 완성한 오양. 이제 진짜 집에 가야 할 것 같다.
17시 57분. 아직 아무도 자리를 뜬 사람은 없지만 오양은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 뵐게요!”
17시 59분. 아까 돈 주는 사람에게 깨지는 모습을 목격한 동료들은 얼른 가라며 괜히 챙겨주기까지 한다.
18시 00분. 당당하게 정문을 통과하며 오양은 생각한다.
“아직도 화요일이라니! 목요일 정도는 되었어야 공평한 것 아니냐고!”
누구를 원망하는지 알 수 없는 원망을 내뱉으며. 오양은 지하철역으로 씩씩대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