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있어 다행이야.
인정하지 않고 싶지만, 나는 다소 예민한 편이 맞는 것 같다. 내 앞에 펼쳐진 수많은 문제로부터 '많이 스트레스받지 않고 언제나 대범하게 넘겨버리고 싶다'는 내 인생의 지상과제는, 내가 본래 그렇지 못한 인간이라는 증거기도 하다...
나는 내 공간을 바지런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게으른 인간이지만, 몇몇 위생 수칙에 있어서는 유난 하달만큼 예민하다.
외출 후 가장 먼저 거품 비누로 손을 박박 씻기,
외출복으로는 절대 침대에 앉지 않기,
화장실 사용 후 변기 커버를 닫고 물 내리기,
다른 사람과 음식을 공유할 때 덜어 먹기.
이런 것들은 지켜지지 않았을 때 내내 마음이 찝찝하다. 몇몇 상황에만 선택적으로 적용되는 이런 예민함은, 갈수록 민감해지기만 할 뿐 결코 무뎌지지가 않았다. (나는 머리를 이틀 감지 않아도 괜찮은, 샤워를 하루 걸러도 괜찮은 사람이지만, 내가 꺼리는 몇몇 같은 상황 앞에서만 유독... 예민하다.)
이런 경향은 독립 이후 더욱 심해졌다. 20여 년을 붙어살던 가족과도 몇 년 떨어져 산 새에 행동양식이 꽤나 달라졌다. 이번 여수 여행 메이트인 엄마와도 그랬다. 엄마는 한 음료수를 번갈아 가며 입 대고 마셔도 괜찮다고 했다. 외출복으로 침대에 앉아도 괜찮다고 했다. 딱 지적하기엔 정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싫은 점들이, 오랜만에 엄마와 긴 시간 함께 보내자니 거슬리기 시작했다. 아마 혼자 살다 보니 내 생활양식은 나 편할 대로 점점 굳어졌나 보다.
특히 맨손으로 과자 같은 걸 집어먹을 때, 안 씻은 손으로 음식을 직접 집어 먹기란 엄청 꺼려지는 일이다. 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바깥 세계의 세균이 내 손에서 바글바글할 것 같다. 평소였다면 근처 화장실로 들어가 비누로 손을 씻거나 최소한 알코올 소독제로라도 손을 비비고 집어 먹었을 것 같다만. 주변 화장실이 100% 파악된, 가방 속에 알코올 소독제가 들어있는 일상과 달리 여행은 역시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긴 줄 서서 사 온 00 빵을 급하게 벤치에서 맛봐야 하는 상황도 생겼고, 트레킹 중에 두 손을 가볍게 하려면 물을 딱 한 병만 사서 나눠 마셔야 하기도 했다. 처음엔 적잖이 꺼려지던 이러한 상황. 불현듯 다가오는 이런 사건들은 혼자 살며 공고히 굳어버린 내 개똥 같은 위생 성벽을 콩콩 부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박 씻지 않은 손으로 빵 한두 개를 집어먹어도 죽지 않는다.
외출복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앉아도 괜찮다.
음료수를 둘 다 입대고 마실 수도 있다.
나만의 공고한 생각 옹벽을 부서트려 줄 여행이 한 번도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만의 행동양식에 갇혀 늘 초조한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과거의 여행을 떠올려 봐도 그랬다. 하루쯤 지붕 없는 흙바닥에서 모포 하나만 덮고 자 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잠자리를 따졌을 것 같다. 2~3일쯤 세수를 못 하는 사파리 투어가 아니었다면 겹겹이 발라진 선크림을 견디지 못하는 내가 되었을 것 같다. 비행기 시간을 잘못 알아 24시간 동안 공항에서 노숙해 본 기억이 없었다면 기다리는 일에 더 짜증을 내는 내가 되어있을 것 같다.
여수 보름 살이라는 귀한 기회로, 오랜만에 일상에서 벗어난 나름 긴 여행을 했다. 즐겁기에도 짧은 2박 3일의 휴가와 달리 여행에서 아프기도, 싸우기도, 지겹기도 해 보니 내가 여행을 사랑했던 이유가 하나둘 생각났다. 내 아집의 옹벽을 콩콩 깨 주는 수많은 사건, 매 순간 즐겁기만 할 수는 없는 시간. 그럼에도 돌아와 생각하면 눈물겹게 감사한 기억들. 이런 이유로 나는 여행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