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집이 사라진다
나는 지금 여수로 조금 긴 휴가를 와 있다. ‘휴가’하면 구경하고 쉬고 먹는 게 최고 아니겠는가? 그래서 오자마자 게장이며 장어며 고기며 여수의 명물이란 것들을 죄다 맛봤다. 그런데 그 중 무언가가 잘못되었는지(아마 게장으로 추측한다...) 배탈이 시작되었다. 먹었던 것들을 신나게 게워내고 하루 이틀은 도통 식욕이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 중에선 꽤나 잘 먹는 편인 내가 남도의 온갖 산해진미를 지천에 두고 식당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다니... 이거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배탈을 진정시키는 약을 들이키고 이틀간 금식에 가까운 생활을 한 뒤에야 조금씩 다시 밥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회나 게장을 사 먹기에는 속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만약 집이었다면 이럴 때 그냥 계란 후라이 하나 구워 김에 밥이나 좀 싸 먹으면 딱 좋겠다 생각했다. 점심때가 지난 시간, 기어이 배는 고파오고 밀가루 면도 회도 아직은 걱정이 되는 나는, 이 타지에서 무엇을 사 먹으면 좋을까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도 어플을 켜 식당을 검색해보지만 ‘맛집’은 이리도 많은데 ‘평범하고 편안한 밥’을 파는 듯한 가게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음식점 리스트의 스크롤을 한참 내리다 눈에 들어온 ‘00백반’.
‘백반? 그런 가게를 우리가 가도 되나?’
백반집, 00백반과 같은 말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어쩐지 우리 세대에게 백반집은 낯설다. 김밥천국에 가는 일은 어렵지 않아도 백반집은 왠지 중장년층의 전유물같이 느껴진단 말이지... 게다가 낯선 곳에서 여행자가 밥집을 찾는 유일한 기준인 ‘후기’도 딱 두 개뿐이다.
‘이런 식당에 가도 될까?’
약간의 걱정도 되었지만, 그 두 개의 후기 속에 투박하게 담긴 밥상 사진이 꽤나 마음에 들어버렸다. 그날의 반찬은 김치찌개에 애호박볶음 그리고 제육볶음 등이었나보다. 반찬 양도 적당하고 구성도 딱 집밥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이번 여행에서 최초로 ‘여수 맛집’이 아닌, 후기가 단 두 개인 백반집으로 향하게 된다.
00백반 가게 앞까지 갔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꽤나 두려웠다. 가게 유리창과 벽면을 빼곡하게 수놓은 ‘백반, 낚지볶음, 생선구이, 삼겹살구이’ 등등의 메뉴들. 낚지볶음 가게도 많이 갔고 삼겹살집도 많이 갔는데. 왜 백반집은 진입장벽이 느껴지는 걸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된 기분으로 가게 문 앞에서 3초를 센 뒤, 백반집 문을 열었다.
점심때가 좀 지난 탓에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간 관광지를 돌아다닐 때 그렇게도 ‘브레이크 타임’의 굴레를 겪었던 탓에, 혹시 이곳도 브레이크 타임인가 싶어 살짝 놀랐다. 문 여는 소리에 주방에서 사장님이 나오셨다.
“안녕하세요. 식사 되나요?”
“이쪽에 앉으세요.”
대답은 단순 명쾌했다.
“뭘로 드릴까요?”
“백반 되나요?.”
“네.”
가게 속을 무던히 채우는 KBS1 TV 방송을 넋 놓고 보고 있자니 금세 밥상이 나왔다.
‘오...’
솔직하게 나는 ‘백반’이란 메뉴는 한 번도 시켜본 적이 없었기에, 1인분 팔천 원이라는 가격에 순식간에 진짜로 열 가지 반찬이 차려질 수 있음에 놀랐다. 그것도 제육볶음과 가자미조림을 포함해서 말이다. 갓 볶아져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제육볶음을 보니 며칠간 잊고 산 식욕이 스물스물 피어났다. 한 젓가락 맛을 보니 음, 역시 제육은 맛있다. 가자미 조림도 더 할 것도 더 할 것도 없이 간간하고 고소했다. 생새우를 넣은 해초 볶음은 처음 먹어보지만 나쁘지 않았다. 감자조림, 김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맛있고. 새콤하게 무친 오징어 숙회는 내가 유독 좋아하는 메뉴라 기뻤고, 가지무침도 이제는 즐길 줄 알기에 대범하게 집어먹어 보았다. 계란 후라이까지 반숙으로 곱게 구워져 나오다니.
순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게장집에서도 장어탕집에서도 ‘맛있다’였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건만. 이제는 밑반찬 하나하나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알기에. 8000원에 이렇게 많은 정성을 내어주고도 남기는 하는걸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하나 부담스럽지 않은 맛에 며칠간 멈춰선 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반찬을 하나하나 맛봤다.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백반집이 사라진다’
백반은 가격대비 너무 많은 정성이 들어가는 메뉴라,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유지되는 메뉴라고. 그래서 지난 세대까지는 흔한 밥집이었지만, 지금 백반집을 운영하는 세대가 은퇴하고 나면 아무도 이런 형태의 밥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말 그럴 것 같다. 내가 음식점을 차린대도 십여 개의 밑반찬을 매일 다른 구성으로 준비해야 살아남는 백반집보다는... 다른 종류의 음식점을 차릴 것 같으니까... 이제 도심에서는 잘 찾아보기도 힘든 백반집이 사뭇 위대하게 느껴진다. 특별한 날 찾아가는 맛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목도 받지 못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음식을 팔고도 네이버 지도에는 단 두 개의 후기 밖에 달리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반찬을 만들어내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편안한 한 끼를 내어주었을까?
아프고 나니 한 끼 밥 먹는데도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어쨌든 평범함의 위대함에 눈 뜨게 해 준 여수 ‘00백반’에 감사한다. 앞으로는 어디서든 백반집 문을 여는 일을 망설이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