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 같던 첫 번째 사람은 엄마였다.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했던 시절,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 절대적으로 보이던 시절. 난 엄마 말을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따르는 아이였을 거라고 자부한다. 그녀 자신의 삶에 남은 ‘후회’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게 투영되었단 사실을 안 것은, 이십 대 초반이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당면한 삶에 급급하여 자신에 대한 이해조차 완성하지 못한 채 엄마가 되었다. 그리곤 자신이 동경하는 모든 삶의 모습을 모아다 내게 조사했다. 내게 비추어진 욕망은 무척 단단하고 건강한 것들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기,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 술과 담배를 멀리하기. 실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이 맞았으나, 뒤늦게 떠올려 보건데 사실 내가 바라는 가치는 아니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주입된 가치들에 지친 뒤, 나는 더욱 나를 탐색하는 일에 몰두했다. 나에 대해 완전히 알기 전에는 절대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되새기며 말이다.
두 번째로 나를 이해해줬던 사람은 이십 대 초반에 만났던 내 인생 두 번째 남자친구였다. 나와는 두 살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이십 대 중반의 그를 나는 아주 ‘현명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때때로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간 익숙해져 버린 내 삶의 숙제들을 그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주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들은 엄마가 말했던 가치와 정면 대치되는 것들이 많아 혼란스러웠다. 술이 인생에 어떠한 재미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착하기만 한 착한 사람이 얼마나 실은 불행한 사람인지. 그와 연애하는 동안 엄마의 가치와 그의 가치가 정반합을 이루어, 감히 내 인생관이라 일컬을 만한 작은 의미들이 내 안에 퐁퐁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인간은 나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타인은 어찌 되었든 각자의 경험에 비추어 타인을 이해하기 마련이니까. 종일 빈둥대는 주말이면, 엄마는 나를 '할 일 없이 인터넷만 하는 중'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실은 너무 많은 할 일 앞에서 잠시간 숨을 고르는 중인데 말이다. 혹은 너무 큰 슬픔에 잠기어 오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일 수도 있는데. 무용히 시간이 흘러가는 주말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생체리듬을 가다듬는 일은 결국 나만이 내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사랑하는 남자친구도, 사랑하는 부모님도 나만큼은 나를 들여다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 뒤, 나는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던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더 이상 타인에게 끝없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선배, 친구, 부모님, 가족들에게 끝도 없이 조언을 구하던 내가 달라지긴 한 것 같다.
유치한 말이지만, '내 마음이니까.'
선배, 친구, 부모님, 사촌언니는 영원히 알 수가 없는 일이니까.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은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