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어떠한 분야에 뚜렷한 취향이 없을 때 부끄러웠다. 음악 장르에 대한 매니악한 취향이 없음을, 술에 대한 깊은 기호가 없음을, 패션에 대한 센스와 취향이 없음을 부끄러워했다.
사실 취향을 발견하는 과정이 쉽지가 않다. 그건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지금도 평범하게 살아가는 나는, 평생 사치를 금기시하고 근면 성실만을 강조해온 부모 밑에서 자란 나는, ‘사치’라는 표현이 참 낯설다. 꼭 내 취향인 술을 찾으려면 취향이 아닐 술을 몇십 잔은 마셔 봐야 했으며, 나만의 패션에 도달하려면 그사이에 수많은 쇼핑 실패가 있어야 했다. 그 실패를 기꺼이 감내하지 않은 나는, 어떤 분야에서 독보적인 감각과 남다른 취향을 선보이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리곤 나의 미성숙한 취향을 ‘다 좋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했다. 다 좋다는 말은 사실 그중에 어느 것도 잘 모른다는 뜻에 가까웠다.
얼마 전 우연히 읽은 ‘교양’은 ‘허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이동진 평론가의 의견이 무척 공감되었다.
어떤 분야에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약간의 지적 허영과 그로 인한 ‘자발적 괴로움을 감내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정신적/물질적 가릴 것 없이 온갖 종류의 허영을 거부하며 살아온 나는, ‘그래서 내 삶의 곳곳에 딥-한 취향이 없음’을 깨닫고 다소 좌절할 뻔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생은 길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분야의 교양을 쌓기 위해서 지속적인 사치를 해 나갈 생각이다.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해, 실은 대단히는 흥미가 없는 분야의 책일지라도 이것저것 읽을 것이고 지루함을 꼭 꼭 이기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지적 허영으로 시작된 각종 탐닉이 결국 나를 그 분야의 취향에 도달하게 해줄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자니, 나도 내 나름 사치 한 분야가 있기는 하다. 사치의 정의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라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으로 규정지어 본다면.
여섯 달 동안 알바 해 모은 천만 원을 오롯이 털어 넣은 20대 초반의 아프리카 여행.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서 중남미로 향했던 20대 중후반의 시간.
이제와 생각해 보니 사치가 맞다. 새로운 세상을 구경해 보고 싶다는 정신적 허영 그리고 금전적 사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일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그 허영과 사치를 통해서 나는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평생 계속해 나가고 싶은 업을 발견했다.
또 한 가지 더 사치를 부렸던 분야가 있긴 하다. 내 이름을 단 여행 에세이를 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내 월급의 절반 가량 되는 수강료를 내고 글쓰기 워크숍에 등록하기도 했다. 큰 값을 치른 만큼 배울 것도 많았고, 나름의 투자를 한 만큼 포기할 수 없다는 다짐도 생겼다. 그 뒤로도 영감에 도움 혹은 자극이 될 만한 책을 구매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며, 내 방 작은 책꽂이가 허용하는 것 이상의 사치를 했다.
창조성을 갈망하면서도 내면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지 않고 있는, 그래서 더욱더 궁핍해지는 사람들에게 작이지만 확실한 사치는 큰 효과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확실한' 사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팽창 속에서, 충분한 공급에 대한 확신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우리를 비옥하게 하는 풍부한 감성을 한껏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아티스트 웨이》 p.197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즐거움을 줄까? 이것이 바로 사치와 관련된 질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라즈베리 한 근으로 그녀는 자신에 풍요로움을 선물한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 p.200
창조적 생활에는 자신을 위한 사치스러운 시간이 필요하다. 모닝페이지를 단박에 쓰는 15분, 일을 마친 후 잠시 욕조에 몸을 담그는 단 10분 만이라도 말이다. 창조적 생활에는 자신을 위한 사치스러운 공간도 필요하다. 우리가 꾸밀 수 있는 공간이 책장 하나, 한병의 창문턱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아티스트 웨이》 p.202
이제는 ‘확실한’ 다음 사치를 통해, 여행과 글 다음으로 빠질 또 다른 취향을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