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별로 꿈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십 대 초중반,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만을 외쳤을 때가 있었다. 모든 것은 부질없다고, 목표 따위는 다 세상이 주입한 허무하기 짝이 없는 가치라고 여길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인생 목표’라고 여길만한 ‘중요한 것들’에 접근하는 방법을 몰랐기에, 진정으로 내 인생에는 특별한 목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지금도 복세편살이라는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는 동일한 의견이지만, ‘그래서 닿고 싶은 방향’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서른 살도 넘어서야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기다니. 참으로 늦은 사춘기를 거쳤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춘기로 마구 혼란스러웠어야 할 시기에는, 더더욱 심각했던 먹고사는 문제와 사투하느라 먹고사는 것과 관계없는 이런 ‘고상한’ 목표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역시 ‘지랄 총량의 법칙’이 맞는지, 남들보다 조금 늦은 사춘기를 거쳤지만. 결국은 삶의 의미를 찾은 내가 사랑스럽다.
조금 늦은 사춘기를 겪고, 이제야 하고픈 업을 찾은 나는. 이번 생에 이런 일들을 꼭 해내고 싶다.
서른하나. 아직 죽음을 떠올리기엔 이른 나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서른 살이 지나면서부터 종종 죽음이 두려워졌다. 인간이 백 살쯤 산다고 치면, 벌써 삼 분의 일을 살아버렸다니. 가장 튼튼하던 인생의 첫 번째 토막은 그 시절의 고마움을 느껴보기도 전에 지나가 버렸다. 30~60세일 인생의 두 번째 토막은 첫 토막보다는 덜 쌩쌩하게, 60~90세쯤 될 마지막 토막은 두 번째 토막보다 더욱 덜 쌩쌩할 일만 남았으리라. 생명과학 역사에 획을 그을 대단한 발견이 있지 않은 한, 내 인생 역시 할머니가 70세 이후 많이 아팠던 것처럼, 엄마가 오십 중반부터 손마디가 아파져 왔던 것처럼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가족을 통해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마주하고 나니, 더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곧 에너지로 바뀌었다. 건강한 동안, 하고픈 일을 많이 하자고. 버킷리스트 100개를 쓰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들로만 꼭꼭 채우느라 아직 100개 가운데 57개밖에 채우지 못했지만. (그중에 몇 가지는 이미 이루기도 했다.)
<수찌 버킷리스트 (일부) 공개>
1. 아프리카 자유여행 (달성)
2. 중남미 자유여행 (달성)
3. 스카이다이빙 (달성)
4.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5. 발리 한 달 살기
6. 여행 작가 되기 (달성)
7. 회사 때려치울 수 있는 여건 만들기
8. 카미노 데 산티아고 걷기
9. 세계 6 대륙 모두 밟아보기
10. 호주나 뉴질랜드 신혼여행
11. 스페인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하기
12. 아프리카 사파리 투어 (달성)
13. 세계 3대 폭포 가 보기 (이과수, 빅토리아, 나이아가라)
14. 우유니 소금사막 가보기 (달성)
15. 세상의 끝 가보기 (우수아이아)
16. 누군가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 되기
17. 자녀를 훌륭하며 독립적인 인격체로 키우기
18. 인도 북부여행 (라다크 레)
19. 남인도 여행
20. 중동 여행
21. 은퇴 후 따듯한 나라에서 살기
22. 다합 다시 가기
26. tv 없이 살기
27. 여행할 때 폴라로이드 챙겨가서 만나는 사람 찍어주기
28. 반려동물 키워보기
29. 진심으로 봉사활동 해보기
30. 유언장 미리 쓰기
...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추가되는 죽기 전까지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다. 이루어야 한다기보단, 그냥 해 보고 싶은 일들.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음에, 그중 몇 가지는 이미 의지를 가지고 실천했음에 감사한다. 육체와 영혼의 신호가 끊어지는 일은 모두에게 두려울 일이지만. 발 닿던 세상에 ‘한’이 남지 않도록, 바라는 일은 즉시 혹은 반드시 해보기. 죽음이 두려운 내가 가장 소망하는 일이다.
예정보다 일찍 피어난 3월의 벚꽃도, 나를 속상하게 하는 친구도, 멀리 떨어져 지내고 비로소 애틋한 부모님도, 언젠가 나의 반쪽이 될 동반자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이렇게 사랑을 갈망하는 까닭은, 사실 내 안에 사랑이 그리 풍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트라우마를 겪은 소설 속 주인공들은 꼭 그 트라우마로 인해 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더 글로리’의 동은이처럼. ‘연진이가 인생의 목표다’는 식의 결말 말이다.
트라우마는 극복하기 힘들다는 프로이트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지만, 언젠가 읽었던 아들러 심리학을 믿어보려 한다.
트라우마에 매몰되어 동은이와 같은 결말에 이르기보단. 미움받을 용기, 그리고 행복할 배포를 가지고 사랑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기쁨과 슬픔의 반복이 심했던 나지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삶을 밀어붙이니 슬픔보단 기쁜 날이 더 많아지는 중이다. 결국은 담장 기슭에서 아슬하게 피는 개나리 가지까지 사랑하는 내가 되기를. 세상 모든 이해 안 되는 인간과 사실까지도 무던히 넘기며 기어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나의 두 번째 소망은 그래서 바로 ‘사랑하기’이다.
고작 31년 사는 동안에도 가치관이 수시로 바뀌었다. 오늘은 내 삶의 목표가 ‘노-후회’, 그리고 ‘사랑하기’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만, 이게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남은 인생의 곡절에서 어떤 또 다른 어려움이 생길지 모르지만. 왼손에 노-후회 오른손에 사랑. 이 두 가지 손잡이를 잡은 나는, 이전과 같이 굴곡 앞에서 마구 출렁이지 않을 자신이 있다.
결국은 생이 끝나는 날 그 두 손잡이를 홀가분히 던지며,
‘사랑하는 날들이었다. 후회는 없었노라.’라고. 웃으며 돌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