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찾은 살아야 할 이유
요즘 나는 삶이 '한 번뿐임'에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심지어 몇 달 전에는 이런 꿈을 꾸고 놀라, 기록해두기도 했다.
꿈에 외삼촌이 나왔다. 지금 60이 넘은 이종0씨가 아니라, 내가 초딩 시절 때 봤던 이종0씨의 모습으로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20년 전 외삼촌은 상당한 장난꾸러기였고 빨간 티코를 자가용으로 몰았다. 자주 그 차를 얻어탄 것도 아니건만. 명절 즈음에 빨간 티코 뒷자리에 사촌들과 쪼롬히 태워져, 이리저리 드리프트 되던 사건이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나 보다. 꿈속에서 잊고 살던 그 빨간 티코 뒷자리에 사촌들과 함께 실려 팍팍 꺾이는 핸들 방향을 따라 신나게 휩쓸렸다.
그런데 꿈속 다음 장면에서 이종0씨가 30대가 아닌 60대로 진화해있었다. 나 역시 초딩이 아닌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꿈속이라 그런지 시간이 놀랍도록 껑충 뛰었고, 티코를 핸들이 빠질 듯 돌려대던 장난꾸러기 외삼촌도 골프밖에 모르는 아저씨가 되어있었다. 곧 환갑이라고도 했다. 인생을 대략 90 정도 산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미 1/3이나 살았다니, 이렇게 두 바퀴 더 살면 이 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꿈속에서부터 너무 슬펐다. 개똥같은 꿈이었지만 꿈속에서의 나는 아주 심각했다. 그 사실이 슬퍼서 엉엉 울면서 꿈에서 깼다. 꿈이 슬퍼서 울면서 깨는 내가 웃기기도 했지만, 그 아침엔 나름의 교훈이 있었다. 시간은 몹시 빠르게 흐르며 돌아갈 수가 없다는 교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매일 맞이하는 하루가, 매번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매일을 즐거운 생각과 행동으로 채워야겠다고 다짐했던 아침이었다.
요즘 이렇게 ‘인생의 일회성’으로 인해 고민이 많았다. 분명 이 사건이 끝나고 나면 더 나은 선택지를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재선택의 기회가 없다는 인생의 특징이 두려웠다. 또 먹고사니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나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서도 고민이 끊이질 않는 4월이었다.
지난달 독서 모임을 통해 읽게 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대인이었던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3년 동안 아우슈비츠 등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끌려온 수용자들은 그 즉시 사회에서 얻은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심지어 나치는 수용자들에게 마지막 남은 마지막 한 가지, 이성마저 잃게 하려 각종 정신적 수치와 고통을 줬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갖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28명 가운데 한 명만이 살아나갔다는 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저자는 오히려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몇 주 먼저 이곳에 들어온 동료 한 사람이 몰래 내 막사로 숨어 들어와서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몇 가지 말을 해 주었다.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비실비실하게 보여서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선배 수감자의 조언이지만, 평범한 오늘을 살아가는 내게도 어쩐지 크게 와 닿던 문구였다. 육체적 생존을 위해 타협하기보다는, 정신적 생존을 위해 철저히 노력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 책에서 박사는 삶의 본질이 ‘책임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는 삶 그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믿고 계속 삶에게 ‘왜 살아야 하냐’고 묻지만. 사실 우리는 반대로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삶에 ‘책임짐’으로써만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다고 했다. 즉 ‘삶의 의미’ 같은 거대한 무언가를 찾아 명상하고 헤맬 때 그 의미를 마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올바른 행동과 태도로 개개인 앞에 오늘 놓인 과제를 묵묵히 수행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이후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무언가를 창조하고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셋째.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첫 번째 방법은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단순 반복되는 삶보다는 반복 속에 변주가 깃든 삶이 재미있으니까. 두 번째 방법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이다. 박사는 가장 깊은 만남은 사랑이라 말했고,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랬다. 사랑함으로써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닌 개성을 볼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잠재력을 찾고 발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도 했다. 이 구절에서 내 책 '그렇다고 회사를 때려치울 순 없잖아'에서 썼던 '사랑, 사랑, 사랑'이란 꼭지가 떠올라 내심 기뻤다. 세 번째 방법이 바로 이 책에서 내내 강조하는 내용이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일지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비극을 승리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요즘 은근한 공포를 느끼고 있던 ‘인생의 일회성’. 이에 관해서도 책 속 메시지에서 사고의 전환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다.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 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반면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 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풍부한 내용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장면이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가진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삶이 잠시간 아래로 곤두박질칠지라도. 현 상황에 대한 의미 부여는 본인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며. 미래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