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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주 Jul 04. 2019

'엄마밥'을 먹고 자란 내 몸

생식기 01.

엄마밥을 앞에 두고 혼란에 빠졌다 


엄마는 내 몸 상태를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음식을 내왔다. 거의 한 달 만에 딸과 사위가 와서일 수도 있고, 괜히 내가 찔려서일 수도 있지만, 그 날의 밥상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거실에 놓인 소나무테이블에는 아귀찜과 소고기구이, 죽순무침, 가지나물, 브로콜리가 착착 놓였고, 마지막으로 전복미역국이 놓였을 때는 ‘내가 엄마한테 얘기를 했던가?’ 착각에 빠질 뻔 했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그 일은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다. 2019년 6월 5일, 나는 생애 두 번째 수술을 했고, 이 일은 엄마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어떤 수술인지 아는 사람은 나와 남편 뿐. 업무상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그냥 간단한 수술’이라고 이야기하고 병실에 누웠다 온 참이었다. 

   

또 수술을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면, 엄마의 행동은 뻔했다. 병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엄마 얼굴. 결코 눈물을 보이지는 않지만 슬픔이 그득한 얼굴로 내 입술에 젖은 거즈를 물려주고, 쉼 없이 손발을 주물러주고 있겠지. 혈관이 잘 잡히지 않아 찔렀다 뺐다를 반복하는 간호사를 보면서 이렇다 할 따끔한 한 마디도 못하면서 이를 부릉부릉 갈고, 간호사가 총총히 떠난 뒤에야 마음껏 나를 안쓰러워 할 테지. 큰 수술을 했으니 한약을 먹어야 한다며 시간을 내라고 닦달하다 못해 당사자 진맥도 없이 한약을 지어올 것이고, 마지못해 한약을 먹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너를 건강하게 못 낳아서…’ 말도 안 되는 자책으로 나를 뜨악하게 할 것이고… 아니,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 고난은 15년 전 한 번이면 족하다. 나에게나 엄마에게나. 


오랜만에 엄마 집에 간 것은 철저히 계획 하에 이루어졌다. ‘보자… 우선 수술 전 주말에 엄마를 한 번 보고, 다음 주부터는 일이 바빠진다고 해둬야지. 그래야 주중에 전화도 안하실 테니까… 그리고 수술하고 3주 쯤 지나면 아이구 아이구 소리 내지 않고도 앉았다 일어났다 할 수 있으니까, 이때 쯤 얼굴을 한 번 비추면 되겠다.’ 그리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 안에 복대를 던져두고 엄마가 사는 아파트에 올라갔더니, 평소보다 훨씬 신경 써서 차린 ‘엄마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멘탈을 부여잡고 “뭘 이렇게 많이 차렸노?” 아무렇지 않은 듯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사실은 울 뻔 했다. 엄마 미안… 근데 엄마도 전에 다쳐서 얼굴을 몇 바늘이나 꿰맸을 때 나한테 얘기 안했잖아.) 


사태의 중심에는 '그 친구들'이 있다      


세상 가장 가깝다는 엄마와 딸 사이에 비밀을 만들게 한 것은 ‘그 친구들’ 때문이었다. 나와 ‘그 친구들’ 간의 다툼은 그 역사가 꽤 긴데, 2004년 난소암을 시작으로 지독한 생리통과 옵션으로 소화불량, 변비, 항문통, 요통, 다리 저림, 빈혈, 이명, 심장 이상 등등을 겪고, 15년 만에 또다시 자궁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하게 된 터였다. 그렇다. 그 친구들은 바로 자궁과 난소, 나팔관과 경부 등등 ‘생식기관’이다. 


15년 전 난소암에 이어 이번 진단명은 자궁선근증. “암은 아니네?” 암은 아니지만 선근증은 생리를 하는 한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질병으로, 이번 수술은 생리통을 덜어주고 임신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주목적일 뿐,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는 수술이었다. 그럼에도 전신마취와 개복, 일주일의 입원과 몇 백만 원의 수술비를 기꺼이 치르리라 마음먹을 만큼, 나에게 생리통은 아니 생리 자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30대 중후반, 결혼은 했으나 아직 아이는 없는 한 여자의 ‘생식기’에 관한 것이다. 자궁과 난소, 그들이 여자의 몸에 벌일 수 있는 다양한 축복과 해코지에 관한 것들. 피임약을 먹어도 갈지마오, 기어코 생리를 하고 마는 강력한 여성호르몬과 생리주기에 관해서. 지금도 이지엔6와 낙센, 타이레놀을 교차해서 먹으며 유혈사태가 끝나기만을 바라는 동지들에 관해서. 고작 생리가 빈혈을 넘어 심장 기능 저하까지 불러들이는 입지전적인 사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리’ 대신 ‘그날’이라고 불러야 하는 오늘에 관해서. 그리고 이런 밑도 끝도 없는  통증 앞에서도 오롯이 내 한 몸의 평안이 아닌, 훗날의 임신과 출산 때문에 쉽게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에 관해서. 내가 ‘엄마밥’을 얻어먹고 컸음에도 쉽게 ‘엄마’가 될 수 없는 수많은 변명에 관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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