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죽음을 품은 삶

by 하계의 이난나



얼마 전, 장염이 와서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장염인데다 입원도 자주 겪는 일은 아니니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호기심 많은 저는 그 와중에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어요.ㅎ


응급실에서 진통제를 맞고 정신을 수습한 뒤 병실에 들어간 터라, 이웃한 분들이 하는 말이 귀에 쏙쏙 들어왔지요.


사실 어디가 아파서들 오셨을까, 궁금하지만 물어본 적은 없어요. 가만있어도 다 알게 되거든요.

말은 안 섞지만 커튼 뒤에서 귀 쫑긋하고 다 듣는 타입ㅋ






옆 침대는 80대 여성을 60대 간병인이 돌보다가, 노모를 요양병원으로 이송할 준비를 하느라 60대 아들이 와있었어요.


"엄마, 이제 다시 (요양) 병원 가실 거예요, 선생님(간병인)이랑 인사하세요."


젠틀하신 아드님이 노모를 돌봐준 간병인에게 인사를 드리는데, 간병인이 '까다로운 분들도 많은데 아드님이 다정하셔서 편했다'라고 하니, '간병인이 계셔서 망정이지 제가 어떻게 돌보겠어요, 너무 감사했어요', 하고 진심으로 화답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러면서 '요양병원에 오래 계시니까 서로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다 달라 대화할 일이 적어져서 말을 잃어버리시더라고요,' 하고 걱정을 합니다.



'내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하는 낯선 질문

<죽는게 참 어렵습니다>에서



'그렇겠구나, 더 중증인 분들도 많이 계시니 지금 상호작용할 수 있는 상태마저 빨리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그러게, 의뢰인과 또래인 여성 간병인 덕에 편히 어머니를 맡길 수 있어 다행이었겠다, 그런데 일하는 여성이며 돌봄 노동의 끝판이라 할 수 있는 간병인도 누군가에게 편하게 본인의 어머니를 맡기게 될까?'


여러 생각이 동시에 지나갔어요.




내가 아프고 병들면 누가 나를 돌볼까?
또 나는 앞으로 누구를 돌볼 것인가?
병들고 장애가 있더라도 존엄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을 수 있을까?
노후를 생각하면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손에 쥔 답은 별로 없다.

p. 122



앞 침대는 90대 어머니를 60대 딸이 직접 돌보고 있었어요.


따님은 성우 저리 가라 할 만큼 우아한 목소리를 가졌는데, 엄마를 돌보고 섬기는 손길과 말씨가 얼마나 고운지 현실 같지 않은 느낌마저 들었어요.


저 들어오기 전날 입원하셨다는데, 그러나 그다음 날이 되자 따님도 지치는지 엄마에게 하소연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엄마, 엄마 이거 좀 드세요...

이거 안 드시면 집에 못 가요, 엄마,

드셔야 나를 도와주시는 거예요, 나도 힘들어요"


듣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어요.


외국에서 오래 사시다가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데, 따님도 쉬고 싶을 나이에 어머니 간병을 하고 계신 거지요.


다행히 어머니는 다음날부터 기력을 회복하셔서 총기를 보이셨고, 따님도 덩달아 행복해지셨어요.


그러는 사이 자신의 힘듦을 공감해 주지 않는 오빠와 다투는 소리, 올케를 원망하는 말도 들었지요.






우리나라에서 노령화와 죽음에 대한 논의 필요성은 이제 코앞에 닥친 범국민적 상황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상 속에서 입에 올리기는 꺼리는 이야기로 취급되고 있는듯해요.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에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부모를 간병하는 사람은 주로 딸이나 며느리라고 합니다. 그 딸, 며느리도 대부분 엄마이자 할머니인데 말이지요.


물론 그들에게 몸을 맡긴 노인, 환자의 마음도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일겁니다.




이 스산한 풍경의 목격자들은 '자식에게 폐 끼치지 않는 것'을 죽음의 목표로 삼는다.
노화와 죽음에 대한 터부가 그 위에서 싹튼다.

p. 143


돌봄은 고단하게 계속 반복되는 일이기도 하고 돌봄 수혜자와 애착과 공감대가 이뤄지는 일이라 정량화가 어렵습니다. 시장의 잣대로 평가하기 쉽지 않기도 하고 할 수도 없죠. 그렇다 보니 돌봄이 저평가됩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재인용



저는 정량화하기 어려운 공감과 돌봄의 끝판인 노인과 환자를 챙기는 노동이, 그래서 저평가된다는 사실을 병실에서 확인한듯해 가슴 아팠어요.


어머니의 맨몸을 아들이 다 살필 수 없는 한계만큼, 아버지의 맨몸을 딸이 보살피지 못하는 건 아닌듯해서 말이지요.


이런 현실은 아들이냐, 딸이냐가 아니라 결국 우리 사회가 돌봄을 노동가치가 아닌 비용의 문제로 보고, 그 결론으로 인해 할머니, 어머니, 딸, 며느리로 이어지는 돌봄의 고된 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누구의 돌봄을 받을 것인가'라는 말의 양면이었다.
존엄한 죽음을 논할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이해당사자다.

p. 179



언젠가 다가올 노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질병 앞에서 우리 모두 자유롭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나보다 더 아픈 어머니를 돌보느라 수고하며 쉬지 못하는 중, 노년 여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해도, 이런 현상에 대한 관심, 애쓰는 여성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연대하려는 관심이 우리 사회의 불균형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바꿔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요?





저도 아픈 덕에, 마음 쓰지 않았던 부분에 눈을 돌리게 되어 다행스러운 마음입니다.


책에서 소개한, 여성의 생애 안에 세팅(?) 되어있는 돌봄을 표현한 단어들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 맘고리즘(mom+algorithm) : 여성의 생애 주기별로 육아가 반복되면서 평생 육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의 현실을 표현한 신조어

◆ 마미 트랙(mommy track) : 육아 등을 위해 출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으되 승진이나 승급 기회는 적은 여성 양육자의 취업 형태

p.157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김영화, 김호성, 나경희, 송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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