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한 관능, 또는 정체감을 데우는 그녀
<마담 이 여사>
김 일석
부산역 앞 허름한 지하다방, 스란치마에 빨간 구두 또각또각 끌며
"김 사장님 보고 싶었어요." "어머나, 오늘은 달처럼 뽀얗네요."
마디 툭툭 던지는 말로 하릴없는 영감들의 쇠한 관능 데우는 이 여사는
고리타분한 다방을 압도하는 중이었다.
볼 발그레한 그 관록의 철학자가 지켜보는 데서
찻값 내는 동무 앞에 뭉기적거리는 게 체면 깎인다고 생각했는지
연금도 들고 이런저런 보험도 들어두었다며 안전한 노년을 내세우는
서너 영감의 너스레가 따분했지만 원두커피 밖에 모른다는 마담 입에선
연신 현란한 시구가 쏟아졌다.
기나긴 생애의 전장에서 무수한 사멸과 재생의 풍상을 오르내렸을 노인들의 연륜과 상투를 흔들며 또각또각 내딛는 이 여사의 언어에는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이 번득였다.
오렌지 주스를 들고 와 앉으며
"보험 많이 들어놓으셨지요?"라고 묻길래
"사랑 말고는 보험 든 게 없어요."라고 했더니
"어머, 약관도 없다는 사랑이라는 보험!"이라 했다.
함박웃음으로 의중을 낚으려는 늙수그레한 여인 앞에서
일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집 <붉은 폐허> 中
중학생일 때, 이복오빠가 심부름을 시키려고 불러서 찾아간 데가 다방이었다.
난생처음 가본 다방엔, 오빠 또래의 이삼십 대 사람들과
늙수구레한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는 언니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주인 같기도 하고, 종업원 같기도 한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과
뭔지 모르지만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은 뭔지 모를 선망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보다는 난생처음 보는 또 하나의 장면, 바로
칼라 텔레비전에 마음이 홀딱 돌아가서
나중에 그 다방이 생각나면 늘 초록색 화면에 뛰어가던
사자가 떠오르곤 했다.
그러던 기억이, 이 시를 읽으면서 온전히 소환되고 말았는데
마치 이여사를 내가 언젠가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상담이 종합예술과도 같은 구현을 요구한다는 것은,
여러 대가들이 비슷하게 진술하고 있는 바다.
우리 사회에서 상담역은 오래전 조선시대엔 무속인들이,
고려시대엔 승려들이, 고조선 시대엔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했을 테지만
요즘 세상에는,
지금처럼 심리상담이 제대로 인식되기 전에
많은 철학가, 사주가, 점술가 그리고 무속인들이
또 그 소임을 맡아주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분들을 만나러 가는 이들은 아무래도 주로 여성이고,
저 유럽의 살롱 드 머시기 정도의 공간에서 우아하게 예술이니 문학이니 논해봄직할 만큼
그다지 지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가장, 또는 보통사람인 사내들,
그저 각자도생의 외로움과 중년 이후의 처연함을 어딘가 나누고 덜 필요가 있는 남자들은 이렇게 다방에 모여 앉아 삶으로 경륜이 꽉 찬 마담이 받아주는 실없는 농담 몇 마디에 어느 날의 무료함이나 때론 깊은 공허함을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에도,
작은 아파트 안에 정원을 가꾸어 누가 와도 잠시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놓고,
우쿨렐레를 치며 사는 마담 프루스트가 그 집에 우연히 들어온 사람에게
치유자 역할을 하며 기꺼이 곁을 내어준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쩌면,
그렇게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고서야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담 이여사의 다방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