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 surfer
새벽부터 울어 재낀 시골 닭 때문에 결국, 보드를 챙겨 바닷속으로 들어왔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다. 시간 개념없는 닭 때문에 피신을 하다니. 발리에 오면 내가 주로 머물며 서핑을 하는 포인트는 메데위(Medewi)와 발리안(Balian)이다. 주로 발리안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지낸다. 작은 숙소 주변에 풀어놓은 몇 마리 닭 때문에 원치 않아도 강제 기상을 하곤 한다. 덕분에 오늘 나는 발리안의 바다의 첫 번째 손님이 되었다.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들어와서 30분 남짓 혼자서 파도를 독차지했다. 하루에 내가 탈 수 있는 파도가 100개라고 가정했을 때 아무도 없는 이 새벽에 30개 이상은 탔으니 어쩌면 오늘 하루는 이대로 마무리해도 만족스럽다. 7시가 넘어서면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서퍼들. 오전 8시가 될 무렵에는 10 명 정도가 바다에 떠 있었다. 그렇게 10 명이서 사이좋게 파도를 타다 점심 무렵이 되니, 어느덧 20 여 명. 바다에 들어온 지 약 5시간 만에 배가 고파 해변으로 나왔다. 그 사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카메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준 서퍼들. 파도를 타러 오고 가는 길에 한 번씩 셔터를 눌러준다. 세팅된 그대로 찍다보니 너무 멀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지만 본인들은 다 알고 있다. 나 역시 저 무리 중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맨날 파도 탄다고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나를 찾지 못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유령 서퍼가 된 이유다. 그래도 나는 저 정도에서 찍은 내 사진이 좋다. 알듯 말듯한 알송달송한 거리감.
오랜만에 파도를 타는 지라 욕심을 내기보다는 이 분위기를 최대한 느껴보고 싶다. 오늘 하루 함께 서핑을 하는 하게 될 서퍼들도 있고 이번주 아니면 이번 달 내내 이 바다에서 마주하며 함께 파도를 탈 수 있기에 저녁 무렵 와룽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목을 쌓는다. 복잡한 포인트에서라면 경쟁처럼 파도를 타지만 발리안까지 온 서퍼들의 성향은 대부분 경쟁적이지 않다. 먼저 타라고 사인을 보내거나 몇 번을 기다려주기도 한다. 이들 중 몇 명은 여전히 SNS로 연락을 하고 있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명언처럼, 파도가 서퍼를 만든다고 믿는 한 사람이다. 파도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는 서퍼들보다 항상 여유있게 생성되는 발리안의 풍요로운 파도는 서퍼들을 너그럽게 만들어 준다. 이런 여유로움을 만끽하고자 바이크로 3시간을 넘게 달려온 것이다. 전에는 나도 큰 파도를 누구보다 빠르게 잡아 타는 것이 목적이었을 때도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고 멋지게 말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인정욕구가 발동했을지도 모르겠다. 경쟁을 통한 우월감이 전부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로 인해 내 몸이 내 마음처럼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다른 길을 찾아야만 했다. 전성기 때의 빠른 직구를 잃고 느린 변화구로 구질을 변경하는 야구 판의 투수처럼, 나는 빠르고 큰 파도를 타는 대신 작지만 느린 파도를 타는 서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항상 가장 앞에서만 보여주고 싶던 관종끼가 사라지고 이제는 조용히 뒤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유렁 서퍼가 된 이유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