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에게 명절은4인용 차의 뒷좌석을 언니, 남동생과 꾸역꾸역 낑겨 앉아 열몇 시간을 버텨야 했던지겹고도 고통스러운 귀성길로 기억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좁은 차를 나누어 타지 않아도 되게 됐던 때는 아빠가 자식 된 도리를 운운하며 가기 싫어하는 자식들에게 호되게 혼을 내는 것을 그만두었을 무렵이었다. 머지않아 그때그때 상황이 되는 자식 한 명만 가도 된다는허락이 떨어졌고, 나는 왜 자식을 셋이나 나은 거냐는 좁은 뒷좌석 시절의 투덜거림을 자식이 세명이나 되니까 이럴 땐 좋다는 농담으로 바꾸어 중얼거리곤 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변화하던 우리 집 명절 방침은 올해 드디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서 쉰다'가 되었다.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좁은 뒷좌석에서 갇혀있는 시간이 그리워진 것은 전혀 아니었고, 자식 중 유일하게 내려온 한 명이 되어 특별취급을 받는 것이 아쉬웠던 것도 아니었다.'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집에서 쉰다'의 '않고'는 사실 '못하니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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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넘어지신 건 한 달 전쯤이었다. 몇 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했고, 그런 할머니가 혼자 지내시는 게 마음에 쓰여 엄마는 매일같이 전화를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아침 먹었어? 어제 잠은 푹잤고?"
평소처럼 할머니에게 안부를 물은 엄마는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의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가던 길에 넘어지셨고, 수술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어쩌면... 할머니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날 밤, 엄마는 많이 울었다. 그날 밤뿐 아니라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날도 계속 울었다. 일 때문에 계속 바쁘다가 이제야 시간이 좀 났는데, 왜 진작 올라가서 곁에 있지 않고 미루다가 이 사단을 냈을까 하며 자책했다. 엄마 탓이 아니라는 내 말은 그저 공허하게 허공을 맴돌 뿐이었다.
살짝 술에 취해 엄마는 말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부모고,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자식이야. 할머니가 이렇게 되셨는데도 엄마한테는 너네가 더 우선이야. 그래서 너무 죄스럽고 속상해..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엄마 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나중엔 너도 알게 될 거야. 덧붙여진 엄마의 말과 쓴 미소가 마음으로 와 박혔다. 아니라고,엄마 마음 나도 다 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말할 수 없었다. 엄마 말처럼 사실은 잘 모르겠어서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건 엄마의 잠긴 목소리와 젖은 눈빛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란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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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행히 할머니의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다만 코로나 때문에 병원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그 사실이 엄마를 더 괴롭히는 듯했다. 올해의 명절이 집에 서 쉬는 명절이 된 것은 그렇게 된 일이었다.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댁.
면회가 허락되지 않은 병원.
아무 곳도 가지 못해서 찾아온 집에서 쉬는 명절.
나는 어쩐지 그렇게 듣기 싫었던 아빠의 자식 된 도리 운운이 조금 그리웠다. 그 도리를 조금이라도 하고 싶어서, '할머니 댁에 가게 해주세요. 올해가 아니어도 좋으니 내년부터는 다시 그런 평범한 날들 오게 해 주세요.'하고 소망했다. 그래서엄마가 할머니에게, 엄마의 엄마에게 그 자식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되어서 더 이상 속상해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랐다.그것이 어쩌면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나의 철없음이 조금이나마 덜 죄송해지는 길이 아닐까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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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모두들 엄마와 같은 심정이었던지 행동파 이모는 평생 마음에 걸릴 것 같다며 할머니를 퇴원시켜버렸다. 만약 병원에서 다시 안 받아준다면 자신이 할머니 곁에 24시간 붙어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보살피겠다고 선언도 했다.
그렇게 올 추석은 여느 때와 같이, 아니 어느덧 한참 지나버린 어릴 적 명절 추억처럼 모두 함께 좁은 차에 끼여 타고 할머니 댁에 가게 되었다. 명절을 쇠러 가기로 결정 나자 집은 다시분주해졌다. 가져갈 음식 준비로 정신이 없다며엄마는 투덜거렸다. 그런 엄마가 활기차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