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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Sep 22. 2020

말이 없는 편입니까?

'후천적' 말 없는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에세이는 좋아한다. 그것도 꽤 많이. 시골 할아버지의 시답잖은 농담 같은 문체가 친근하고 우스워서, 기분전환이 필요한 때면 종종 꺼내 읽는다. 이 에세이의 제목 "말이 없는 편입니까?"는 하루키의 에세이집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에 수록된 에세이 중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루키의 에세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은 말을 많이 하는 편인지, 아니면 별로 말이 없는 편인지?

나는 별로 말이 없는 편이다. 상황에 따라 말이 술술 나올 때도 있지만 평소에는 그다지 말을 하지 않는다. 뭘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편이라서 되도록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



나로 말하자면, 하루키의 글과 제목이 같은 이 에세이를 첫 문장마저 똑같이 써도 될 정도이다. 당연히 정말 친한 사람과 있을 때나 가끔 신이 나면 말을 많이 할 때도 있지만 그처럼 '평소에는 그다지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뭘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편이라서 되도록 그런 것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하지 않는 이유와는 꽤 다른 이유 때문이다.



사실 나는 후천적 '말이 없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도 수다쟁이는 아니었지만 말이 많고 없고를 생각해본 적도 없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말이 없어졌다. 뭘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뭘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두려워서.



모르면 무식하다고, 대학교 1, 2학년 때만 해도 '내가 아는 게 틀릴 리 없어'라는 믿음으로 온갖 것들을 말하고 다녔다. 시사 이슈, 전공 지식, 어제 본 영화 이야기, 오늘의 내 감정, 새로 알게 된 동기는 어떤 사람인지까지. 그 어떤 화제라도 내 지식, 생각, 감정을 꺼내 보이는 것에 주저함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떤 말을 하기 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대학원까지 가서 공부한 내 전공도, TV에서 연신 떠들어대는 시사이슈도 '틀리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이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인가?', '이거에 대한 반박이 많지 않나?'싶은 생각들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처음에는 지식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입으로 뱉기 전 망설인다는 것을 자각하고 난 후에 보니, 나는 "오늘 기분이 어때?", "좋아하는 노래는 뭐야?"와 같은 나 자신에 대한 질문에서조차 생각이 많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변화는 '내가 아는 게 틀릴 리 없어'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온 것 같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은 내가 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틀릴 수도 있으며 사실 제대로 알고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었고, 대학교 때 푹 빠져 내 삶을 아예 바꿔놓았다고 생각했던 어떤 -주의들도 여러 일들을 겪으며 내가 생각했던 그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날 상처 입혔고, 평생을 나 자신을 돈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해왔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돈에 연연하고 있었던 스스로를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대화를 할 때 다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적당한 타이밍에 적당한 반응만 하 된. 누군가 내게 질문을 던져 오면 "어... " 하고 말을 고르다 결국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럴 때면 난 조금 변명하고 싶어 진다. "제가 망설이는 이유는 대화 주제를 모르거나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아니에요, 언젠가 혹은 대화 도중에라도 변해버릴 수 있는 불확실한 것들을 대답으로 내놓고 싶지 않아서랍니다."하고. (진짜 그렇게 말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서 나는 후천적 말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 100퍼센트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신중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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