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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May 13. 2020

꽃이 되는 순간

템플스테이 홍보관에서의 추억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너무도 유명한 시, 김춘수의 「꽃」을 읽고 다들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가 지어주신 본명, 친구들이 부르는 별명, 천주교 세례명 세실리아 그리고 법명 수카.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늘 나름 많은 내 이름들 중 수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태허 스님이 생각난다.




태허 스님을 만나게 된 건, 햇빛이 쨍하고 비치던 여름날 템플스테이 홍보관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였다. 종로 조계사 맞은편에 위치한 홍보관은 내외국인들에게 템플스테이를 안내하고 홍보하는 곳이다. 나는 우연히 보게 된 홍보관 서포터즈 구인 공고에 불교에 대한 막연한 호감과 영어 회화 연습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지원서를 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출근한 날 알게 된 서포터즈 일은 크게 템플스테이 안내 및 예약과 방문객들과 함께 하는 각종 체험 프로그램 진행으로 나누어졌다.


상냥하게 일을 가르쳐주시던 직원 분이 말했다.


“앞으로는 스님과 함께 일하실 거예요. 모든 체험 프로그램은 스님께서 주도하실 거고, oo씨는 스님을 열심히 서포트하면 돼요. 지금 잠깐 사찰음식 만들러 가셨는데, 곧 돌아오실 거예요.”


서포터즈가 홍보관 서포터즈가 아니라 스님 서포터즈였구나. 잘 보여야 된다는 마음에 긴장하며 스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렸다. 댕-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스님께 합장 후, 힘차게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ooo 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정과 긴장이 묻어나는 내 목소리에 스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하셨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태허라고 해요. oo씨는 법명 있어요?”

“아니요… 없습니다.”


불교가 아닌 사람을 뽑은 게 처음이라는 직원 분의 말이 생각나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돌아온 태허스님의 말은 의외였다.


“그러면 내가 지어줄게요.”



    

홍보관에서의 둘째 날, 법명을 지어주시겠다고 말한 후부터 나를 계속 지켜보시던 스님은 말하셨다.


“수카 어때요? 산스크리트어로 행복이라는 뜻이에요. 법명뿐 아니라 모든 이름은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 후,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길 바라는 기원을 담아서 지어요. oo씨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에요.”


말을 마치자마자, 태허스님은 다시 사찰음식을 만들러 가셔야 한다며 발걸음을 급히 옮기셨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중년의 남자분이 스님을 찾아왔다. 약속을 잡고 오셨다는 말에 마음이 조급해져 문자를 적었다. ‘태허스님, 손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빨리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아직 한 번도 연락드린 적이 없으니 번호를 모르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급히 덧붙였다. '-oo 드림-' 발신을 누르려다 잠시 멈칫한 나는 문자를 지우고 다시 썼다. '-수카 드림-' 행복이란 뜻의 이름이 너무 감사해 불러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얼마 후 문자를 보셨는지 급히 돌아오신 태허스님은 활짝 웃으시며 나를 부르셨다.


“수카~”




주 5일 꽉 찬 대학 시간표와 가난한 서울에서의 자취생활, 처음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며 있었던 남자친구와의 갈등, 부모님의 불화. 돌이켜보면 괴로운 일들이 많은 때였다. 그런데도 한여름부터 추운 겨울까지 템플스테이 홍보관에서 일한 6개월은 내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있다. '수카-' 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면 힘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머나먼 외국에서 온 방문객들과 연등을 만들거나, 매주 조계사에 갔다가 들르시는 보살님들과 스님께서 내려주시는 차를 마실 때면 행복이라는 뜻의 ‘수카’에 정말 어울리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함께 차를 마시던 어떤 날,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자 태허스님이 말하셨다.


 “수카. 사람들이 나랑 인연이 계속되고 아니고는 어찌할 수 없는 거야. 인연을 이어가는데 집착하지도, 애쓰지도 마. 힘든 날 꺼내볼 수 있는 함께 있어서 행복했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스님 말씀처럼 지쳐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때면 홍보관에서의 나날들을 꺼내본다. 이제는 인도로 가셔서 뵐 수 없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으니 충분하다고 중얼거리며 지난 추억들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늘 태허스님이 내게 수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순간, 수카라고 처음 불러주신 이 순간들에 닿게 된다. 그러면 늘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행복이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하고 다시 일어설 힘이 난다.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노래한다. 태허스님은 내게 그런 존재다. 나를 알아봐 주고 불러준 사람. 그래서 나를 행복해도 되는 사람이자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 사람.


수카라는 이름과 함께, 나는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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