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끝에 서있던 날들이었다. 청명한 낮의 하늘은 얄미웠고, 밤이 찾아오면 아득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 보니 집 꼴은 엉망이 되었고, 쌓이고 쌓인 일들이 버거워 다른 것들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좋아하던 동네 산책도, 혼자 보는 영화도 재미없었다.
그 날 나는 누구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 위해 인터넷의 우울한 이야기들을 일부러 찾아 읽고 있었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글들이었지만 이조차 없으면 너무도 외로워질 것 같아 창을 닫을 수 없었다.
그렇게 보게 된 글이었다. 너무 우울하고 무기력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그 글에 달린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댓글을 쓴 사람은 자신 역시 늘 우울해 왜 내 삶은 재미없고 슬픈 일들만 있는지 고민했었지만, 지금은 즐겁고 소중한 일들로만 가득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비결은 좋아하는 일을 공부나 업무처럼 의무적으로 하기였다.
어쩐지 눈이 일찍 떠진 다음 날, 방 한편에 오랫동안 걸려있던 빈 화이트보드가 눈에 띄었다. 화이트보드를 내리고 펜을 들어 제목을 적었다.
해야 할 일
삼시세끼 건강하게 챙겨 먹기
규칙적인 수면시간 지키기
하루 30분 이상 영어 공부
전공 공부 열심히 하기
매일 조금이라도 운동하기
엄마한테 전화하기
줄줄이 써 내려간 해야 할 일들은 조금은 뻔한 것들이었다. 기본적이지만 우울과 무기력함에 쌓여 지킬 수 없었던 것들. 적혀있는 할 일들을 가만히 쳐다보다 펜을 들고 하나를 더 적었다.
차 마시기
차를 좋아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을 때 생기는 부담감을 알고 있었기에 평소라면 절대 해야 할 일에 차 마시기를 써놓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지친 하루 후에 마시는 차 한 잔이 주는 위로 역시 알고 있었기에, 이번만은 부담을 버리고 ‘하루에 하나라도 좋아하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기’를 따라 해 보기로 했다.
찬장에는 인생이 재미있었을 때 사다 놓은 차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중 하나를 고르고, 물을 끓였다. 끓어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찻잎을 덜었다. 찻잎을 거름망에 넣고, 적당한 온도로 맞춰진 물을 천천히 다관에 부었다. 우러난 차를 찻잔 위에 붓고, 손으로 잔을 감쌌다. 따뜻했다. 천천히 향을 맡은 후, 차를 마셨다. 왠지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 날부터 하루에 한 잔씩 차를 마셨다. 정신없이 바쁜 날에는 손을 뻗어 잡히는 아무 티백이나 넣고 대충 우린 차라도 마셨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매일 마시는 차는 우울한 일들의 무게를 씻겨주었고, 다른 좋아하는 일을 해볼 힘도 주었다. 재미없게 느껴지던 동네 산책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맑은 하늘이 다시 좋아졌고, 자기 전 눈을 감고 하루를 되새기면 떠올리면 즐거웠던 일, 좋았던 일들이 계속해서 생각났다.
여전히 나는 차를 마신다.
여유 있는 날은 오후 세시쯤 달달한 디저트와 함께 진한 홍차를,
잠 안 오는 밤에는 몸을 데워주는 따뜻한 허브차를,
고요한 아침에는 맑은 녹색의 구수한 녹차를.
하루의 분위기와 맞는 적절한 차를 고르고 마시는 순간이 즐겁다. 천천히 음미하며 차를 마시고 나면, 아무리 힘든 하루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은 하루가 된다. 그래서 나는 화이트보드 위 “해야 할 일”의 차 마시기를 절대 지우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