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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May 19. 2020

홍시가 열리면 울 아빠가 생각이 난다

아빠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순간


가을이 무르익은 쌀쌀한 .

집으로 가는 길가의 작은 노점상들은 하나둘씩 붉은 홍시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나는 탱탱하게 차오른 주먹 만한 홍시를 볼 때면 늘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아주머니, 홍시 한 바구니만 주세요. 잘 익은 애들로요~'하고 말하게 된다. 집에 도착해 홍시들을 바로 냉동실에 넣어놓고, 30분 정도 기다리다 하나만 꺼내온다. 차가운 홍시를 숟가락으로 살살 퍼서, 한입 딱 넣었을 때 입안에 가득 차는 그 탱글한 달콤함이란! 그렇게 홍시를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나도 모르게 꼭 흥얼흥얼 부르게 되는 노래가 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엄마가 생각난다는 나훈아의 애틋하면서도 따뜻한 노래, ‘홍시’다.




처음 홍시라는 노래를 알게 된 건 고등학생 1학년 때였다. 나는 고등학생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자가 끝나 신난 마음에 친구와 떠들며 학교를 나서다가 계단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응급실의 의사 선생님은 깁스를 6개월 넘게 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깁스를 한 채 차로 20분 거리의 학교까지 왔다 갔다 해야 한다니 앞 길이 막막했다. 그동안 이용하던 스쿨버스를 이용할 수 없을 것 같아, 엄마는 등교를, 아빠는 하교를 도와주기로 했다. 바쁘신데 도와주신다니 정말 감사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아빠랑 둘이서 차 타는 건 어색할 것 같은데,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들었다.


아빠가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사소한 잘못에 크게 혼이 나던 어린 시절 때문인지, 아니면 떨어진 성적에 차가운 아빠의 표정을 봤던 날부터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엄마가 아빠 때문에 울던 날이 많아지고 난 이후였을까. 어느새 아빠는 나한테 너무 먼, 같이 있는 걸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시작된 아빠와의 하굣길에서 나는 늘 교과서에 고개를 처박고 있거나 피곤하다며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런데 우연히 교문 앞 차를 세워놓고 서성이며 내가 나오길 기다리는 아빠의 얼굴을 봤던 밤, 나는 불쑥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의 피곤한 얼굴에, 목발을 짚고 걸어오는 나를 향한 걱정이 잔뜩 묻어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으로 손을 흔들며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자, 아빠가 조금 놀라며 같이 손을 흔들었다. 차에 탄 후, 나는 처음으로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굳이 ‘척’하며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조용한 상태로 5분쯤 지났을까. 아빠가 차에 있는 CD를 뒤적거리며 말을 건네 왔다.


“노래 들을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고른 CD는 나훈아의 앨범이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나훈아의 노래들이 생각보다 듣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말했다.


“금방 나을 거니까 너무 걱정 마라.”


괜찮냐는 질문조차 없이 툭 던진 말에 갑자기 서러운 마음이 복받쳤다. 깁스를 한 채 절뚝절뚝 3층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체육시간도 점심시간도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보내야 하는 것도, 모든 상황이 힘에 부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던 그때 흘러나온 노래가 나훈아의 홍시였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 셰라

비가 오면 비 젖을 셰라

험한 세상 넘어질 셰라

사랑 때문에 울먹일 셰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따뜻하면서도 슬픈 멜로디가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아빠가 슬쩍 내 손을 잡아왔다. 아빠는 손에 한 번 꾸욱 힘을 주더니, 내게 말했다.


“괜찮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차 안에서 자주 노래를 들었다. 가끔은 다른 앨범도 들었지만, 홍시가 들어있는 나훈아의 그 앨범을 제일 자주 들었다. 그렇게 6개월이 훌쩍 지나고 내 다리가 나은 후에도, 엄마와 아빠는 계속 나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왔다. 어느새 내게 엄마와의 시간만큼이나 아빠와의 시간이 편해져 있었다. 그래서 어느새 2학기가 오고 아빠가 정말 홍시를 가져와 건네주었을 때도 나는 신나게 웃으며 홍시를 먹을 수 있었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는 나훈아처럼, 나는 달달한 홍시를 한 입 먹을 때면 울 아빠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 아빠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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